[신쌤의논술돕는책] 논술 강사의 우상, 고종석
[신쌤의논술돕는책] 논술 강사의 우상, 고종석
  • 북데일리
  • 승인 2008.03.1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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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가장 글을 아름답게 논리적으로 쓰는 작가를 꼽으라면 필자는 서슴없이 ‘고종석’을 꼽겠다. 본인은 격조와 깊이에서 도저히 김현의 글과 견줄 수 없다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그야말로 과공비례인 듯싶다.

고종석은 서가에 꽂혀 있는 김현 전집 가운데서 아무 거나 뽑아 들어 띄엄띄엄 읽노라면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는데 필자가 그렇다. 눈으로 글자를 읽어도 의미는 머리에 안 들어 올 때가 있다.

난독증까지는 아니지만 읽기에도 분명 슬럼프가 있는데 그때마다 고종석의 글을 읽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글을 읽어야 하는 이유’ 같은 것을 느낀다. 여기서 내가 책이 아니라 글이라 한 까닭은 필자는 고종석의 미문을 책 뿐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서도 주기적으로 ‘즐감’하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방문할 일이 거의 없을 언론사 사이트에 주기적으로 접속하는 이유도 바로 그의 글을 읽기 위해서였다.

이만하면 고종석의 ‘빠’라고 부를 수 있는데 2006년 숙명여대 정시 논술 고사에서 그의 글 ‘불순함에 대한 옹호’가 제시문으로 쓰였을 때 필자는 정말 신났다. 명분이 생긴 것이다. 그 후부터는 우리나라 대학교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니까 꼭 읽어야 한다면서 수업 시간에 그의 글로 윤독 잔치를 했다. 그의 글을 소리 내어서 읽고 리듬과 논리적 뼈대를 자기 것으로 만들라는 주문이었다.

하도 많이 소리 내어 읽어서인지 ‘서얼단상’에 실린 ‘우리와 그들-순수와 순결을 넘어서’ 같은 글은 외우다시피 한다. 논술 강사 중에서 고종석 빠는 필자만이 아닌 듯 했다. 다른 강사들 역시 논술 수업 중에 그의 글을 많이 활용한다고 했다.

고종석은 대한민국 논술강사들이 그의 글을 수업 교재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인에게 듣고 논술 강사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겼는데…, 정확한 출처는 기억이 안 난다. 수능 강사라는 양지와 달리 돈도 안 되고 알아주지도 않는 음지의 논술 강사들에게 그런 말 한 마디가 보람이고 위안 아니겠는가?

시인공화국이라는 부제로 2006년에 나온 <모국어의 속살>에 이어 이번에 나온 이 책 <말들의 풍경>(개마고원) 역시 그 신문에 잇대어 쓴 글을 모았다. 그 사이트에서 대부분 이미 읽은 글이지만 다시 읽어도, 몇 번씩 읽어도 좋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언어학 에세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언어를 언어학 안에서 보는 관점과 바깥(주로 정치)에서 보는 관점이 섞여 있다.

먼저 바깥에서 보는 관점부터 살펴보자. 그가 전에 썼던 언어학 에세이와 다른 점은 서평이나 작가 비평이 좀 더 많이 들어가 있다는 점일 게다. 김현-김윤식-양주동 같은 학자에 대한 평가도 평가지만 그보다는 정운영-최일남-임재경-홍승면 등 그에게 사표가 되었던 언론인들에 대한 평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필자도 대학 시절 중독된 정운영에 대한 양가적 평가가 인상적이었다. 화사한 그의 문체와 누구도 흉내 내기 힘든 박람강기를 당대 최고 수준의 문재로 추켜세우면서도 만년에 쏟아진 냉소와 신경질 그리고 추상과 관념으로서의 노동 계급이나 민족을 옹호한 점에 대해서는 따끔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앞에서 그의 글이 아름다우면서 논리적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전공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가 살아온 궤적은 그의 글에서 저널리즘적인 흥미와 학술적인 아우라를 동시에 보증해 준다. 잘 알려진 대로 고종석은 대학에서는 법학을 전공했고 석박사 과정에선 언어학을 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그를 언어학자 고종석보다는 한겨레신문 기자와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기억한다. 학술적인 깊이보다는 저널리즘적인 흥미를 그의 글에서 찾기 쉬울 것이다. 실상이 그렇다.

특히 이번 책에서 아쉬운 점은 언어학 틀 안에서 보는 관점에서 다뤄진 많은 내용들이 기존의 책에서 이미 그가 발화한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표준어와 방언을 비교하면서 든 사례들이 그렇다. 일종의 자기표절인데 그런 사실을 독자들에게 서문에서 사과하는 저자가 고종석 말고 또 있을까? 나는 그 점도 좋게 본다.

필자가 언어학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학술적인 평가를 내리기 그렇지만 인터넷 언어 현상을 심도 있게 다루었고 친족 명칭과 경어 체계, 모음 체계의 변화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트렌드를 읽어낸 점은 성과를 인정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끝머리를 ‘다’로 맺는 이른바 ‘다’의 독재에 반대하는 이오덕의 진지함과 하오체, 하삼체, 태희체(“나 맘 잡고 열공할 태희야”)등을 유행시키는 네티즌들의 가벼움에게서 탈권위와 민중지향이라는 공통점을 읽어낸 것이 좋았다.

결론은 언어학 이야기를 해도 고종석의 매력은 에세이, 그것도 정치 에세이에 있다는 이야기인데 재미있는 것은 그의 정치 성향이다. 고종석 본인은 우파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하지만 민족주의와 민족주의에 포섭된 전통 언론에 대해서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내가 보기엔 분명 좌파다. 좌파기는 하지만 인터넷 공간의 익명성이 뿜어 대는 자유의 악취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좌파의 내부고발자로 볼 수 있고 박노자, 진중권과 가장 가깝다. 하지만 박노자나 진중권 만큼 자본에 대해서 급진적이고 비판적이지는 않다. 그가 좌파가 아니라는 증거도 얼마든지 있는데 특히 복거일에 대한 그의 지지와 열광은 우파보다 심하면 심했지 못하지 않다.

5년 내내 노무현 정권에 대해서 우호적이었다는 점도 중간에 노무현 정권과 결별한 기존의 좌파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면 중도일까, 아니면 반좌-반우일까? 좌면 어떻고 우면 어떤가? 글과 문장에 관한 한 그에게서 원형을 찾으려고 몸부림치는 나 같은 충실한 ‘고빠’들은 우파, 좌파 모두에 겹쳐 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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