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포토] 아비지옥 같은 삶, 강박자들이 모인 세계
[북포토] 아비지옥 같은 삶, 강박자들이 모인 세계
  • 박세리 기자
  • 승인 2015.10.26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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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미 소설집 <목련정전>

[화이트페이퍼=박세리 기자]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매달린 검은 빛깔 목련 잎. 까닭 없이 무거운 느낌이다. 목련이 맞긴 맞을까.

<목련정전>(문학과지성사.2015)은 동화나 설화의 형식을 즐겨 차용한다는 최은미 작가의 신작 소설집이다. 그만큼 동화적이고 신화적인 색채가 강하지만 서사 안에 내재한 풍경은 개인들의 격정과 강박감이 모인 아비지옥의 우리 삶이다.

다음은 소설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표제작의 한 대목이다. 묵직하고 텁텁한 공기가 콧속으로 흘러드는 듯하다.

참을 수 없이 텁텁한 공기가 모두를 둘러싸고 있다. 백중이 다가오면 마을을 덮치는 공기. 무덥고도 무거운 공기. 이제 백중날엔 김이 올라오는 백설기도 잘 익은 과일도 없다. 목소리가 좋은 이야기승도 없고 제를 올리는 스님도 없다. 모두가 떠났다. 불상 위로 거미가 오갈 뿐이다. 느닷없이 죽은 아이와 아내와 남편과 노모, 그들을 위한 추모가 있을 뿐이다. 한여름빛도 보름에 뜨는 달도 이 무거운 공기를 걷어가지 못한다. -97쪽, <목련정전> 중에서

<창 너머 겨울>의 ‘나’와 ‘어머니’는 ‘곰팡이’로 기억되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녀들은 락스와 항균제에 강박적으로 빠져있다. 처절하기까지 한 묘사가 눈에 띈다.

장례 기간에 아버지의 모든 것을 불태웠다. 아버지가 죽어가는 동안 썼던 베개와 요, 아버지가 누워 있던 방의 책상과 의자까지 다 태웠다. 그래도 근지러웠다. 어머니는 한 달 넘게 그 방을 락스로 닦았다. 벽 도 닦고 천장도 닦았다. 집 안 곳곳에서 유한락스 통이 소주병처럼 뒹굴었다. 바람이 불면 화학액에 삭은 고무장갑이 빨랫줄에 매달려 손을 흔들었다. 어머니는 알코올중독자처럼 락스를 사들였고 그때부터는 사과에서도 상추에서도 속옷에서도 락스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41쪽, <창 너머 겨울> 중에서

소설은 삶에서 일어나는 비극들을 잊어버리고 거짓 희망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기보다는 목격하고 증언하며 이유를 치열하게 묻는 것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라고 되묻고 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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