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 없는 정혜윤 PD의 낯선 여행서 읽는 재미
사진 한 장 없는 정혜윤 PD의 낯선 여행서 읽는 재미
  • 박세리 기자
  • 승인 2015.10.22 15: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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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야간비행>

[화이트페이퍼=박세리 기자] 보통 여행 산문집을 생각했다면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들 것이다. 글자만 빼곡한 여행 책. 사진 한 장 찾아볼 수 없고 활자만 가득하다. 여행서적이라면 응당 갖춰야 할 관광지나 교통편, 맛 집 정보도 없다. 이런 산문집에 여행이라는 단어가 어울릴까. 황당하기 짝이 없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울린다. 사실, 여행서에 사진이 수북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고정관념이다.

<스페인 야간비행>(북노마드.2015)은 새로운 실험이다. 이를테면 서간문을 빌린 책의 형식도 그렇다. 보내는 이는 ‘당나귀’ 받는 이는 ‘미스 양서류’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를테면 필리핀 보홀 섬의 나비 농장을 방문하고 리스본에서 갔던 주제 사라마구 박물관의 경험을 교차시키며 두 작품을 소개한다. 주제 사라마구의 <리스본 쟁탈전>과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다.

<리스본 쟁탈전>의 주인공은 편집자다. 그는 홀로 사는 삶에 체념한 어느 날 어떤 교정지의 문장을 바꾸게 된다. ‘십자군이 포르투갈인들의 리스본 함락을 도울 것’이라는 문장에 ‘않는다’는 부정어를 한 단어를 추가한다. 이후 그의 삶은 삐걱거린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기 시작하고 사랑을 경험하는 등. 새롭게 태어난다.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축복받은 자로 바뀐 것.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의 주인공도 혼자 사는 오십 대 남자다. 중앙호적등기소 사무 보조 직원으로 외로운 처지로 유명인들의 기사를 수집하는 특이한 취미를 가졌다. 등기소에 잠입해 정보를 빼내 자신의 노트에 옮겨 적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다 한 평범한 여자의 기록이 딸려오게 되고 스스로 이유도 모른 채 그 여자를 알기 위해 집으로 찾아가 주변을 맴돈다.

두 작품 속 주인공들은 모두 무기력하고 체념 어린 삶 속에서 각각 어떤 계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선택했다. 저자는 두 주인공도 우리네 청춘이 그러하듯 수많은 선택 앞에서 불안을 겪을 거라 말한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 더 예민해질 거라고. 그런 이유로 더 젊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자신에 대한 ‘절대 긍정’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부정 ‘아니요’를 다시 시작하는 것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 심리적 안정감이나 안도감을 주던 세계에서 불확실한 쪽으로 이주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시기가 반드시 ‘난 할수 있어. 꿈은 이루어질 거야’ 따위의 절대 긍정에만 있지 않다는 말이다.

책의 큰 골격은 보홀 섬의 여정이지만 작가의 경험과 에피소드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여러 작품과 사유로 이어진다. 낯선 형식으로 인해 독서의 비등점을 찾기까지 시간이 적잖이 걸리겠지만, 이 독한 독서여행자의 안내에 몸을 맡겨 보는 일은 흥미롭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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