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옥의 시집가는 길] '하늘농사' 깨우친 시인의 자연농법
[김현옥의 시집가는 길] '하늘농사' 깨우친 시인의 자연농법
  • 김현옥 시민기자
  • 승인 2015.10.13 15: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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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새로 온 꽃>(2004.창비)

[화이트페이퍼] 가을은 수확의 계절입니다. 바다에서는 새우와 전어가 팔딱거리고, 땅에서는 고추와 호박이 묵직하게 익어갑니다. 산에서는 성질 급한 다람쥐와 청설모가 잣과 도토리를 땅바닥에 던지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가을입니다.

산길을 걷다 보면 나이 지긋한 분들이 도토리나 밤을 줍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국립공원마다 ‘동물들의 겨울식량인 도토리, 밤을 함부로 줍지 마세요’라는 경고문을 심심찮게 볼 수 있죠.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영원한 숙제인 듯 합니다.

도토리나 밤, 잣을 줍다가 마음이 편치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윤재철 시인을 따라가 보길 권합니다.  <세상에 새로 온 꽃>(2004.창비)을 들고 지구상에서 가장 생존력이 강한 ‘아줌마 부대’들과 동네 뒷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같이 가 보시죠.

아침마다 아주머니들

배낭 하나 등에 메고

보자기를 자루처럼 배 앞에 두르고

도토리 주우며 산을 오른다

어제 샅샅이 주운 자리에

또 어제만큼 떨어져 있는 도토리

허리 숙인 만큼

팔 뻗었다 올린 만큼 도토리를 줍는다

그 일이 짜증나서 어떤 남정네

해머 들고 도토리나무 두들기지만

오늘 많이 주우면

내일은 주울 것이 없다

그리고 모레 떨어질 것은

아무리 해머로 두들겨도

끝내 떨어지지 않아

모레가 되어야 하늘에서인 듯 떨어진다

-‘도토리 농사1’ 중

휴일 집 근처 산에 오르면 새벽부터 가족끼리 나와 밤나무 잣나무와 씨름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손으로 흔들다 안되면 발로 차고, 그것도 모자라 나뭇가지나 돌을 던지기도 합니다. 이런 ‘최종병기’는 자칫 나무는 물론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됩니다.

아무튼 다람쥐의 겨울준비를 보면서 시인은 인류의 생존방식을 안데스산맥 고산지대로 숨어든 잉카의 후예들에서 찾습니다.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쫓긴 그들의 목숨을 구한 것은 잘디잔 형형색색의 십 여종의 감자라고 합니다.

텔레비전을 통해 본 안데스산맥

고산지대 인디오의 생활

스페인 정복자들에 쫒겨

깊은 산 꼭대기로 숨어든 잉카의 후예들

주식이라며 자루에서 꺼내 보이는

잘디잔 감자가 형형색색

종자가 십여 종이다

왜 그렇게 뒤섞여 있느냐고 물으니

이놈은 가뭄에 강하고

이놈은 추위에 강하고

이놈은 벌레에 강하고

그래서 아무리 큰 가뭄이 오고

때 아니게 추위가 몰아닥쳐도

망치는 법은 없어

먹은 것은 그래도 건질 수 있다니

전제적인 이 문명의 질주가

스스로도 전멸을 입에 올리는 시대

우리가 다시 가야 할 집은 거기 인디오의

잘디 잘은 것이 형형색색 제각각인

씨감자 속에 있었다

-‘인디오의 감자’

하지만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중국집 처마 밑에서 야위어가는 어머니와 병원침대 귀퉁이에 사지가 묶인 아버지가 돌아갈 곳을 찾지 못해 울부짖습니다.

오이가 비를 맞고 있다

가락시장에도 못 간

구부러지고 볼품없는 흰 오이

예닐곱 개씩 쌓아놓은

무더기가 예닐곱 개

좌판도 없이

아스팔트 맨땅 위에

얇은 비닐 한장 깔고 앉아

비를 맞고 있다

장날도 아닌 공주 시장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아주머니는 중국집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턱을 괴고 있는데

대책 없는 오이는 시퍼렇게 살아

다시 밭으로 가자고 한다

-‘공주 시장’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이 점차 흔미해지면서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거기서 아버지는 몸부림치며

집으로 가자고 소리쳤다

링거 주삿바늘이 뽑히고

오줌주머니가 떨어졌다

남자 보조원이 아버지의 사지를

침대 네 귀퉁이에 묶어버렸다

나중에는 아무 말도 못하면서

짐승처럼 몸부림만 쳤다

팔목이며 발목이 벗겨지도록

집으로 가자고

고향도 아니었다

집이나마나 창신동 골목길 셋방이었다

-‘아버지’

시인은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보이는 만큼만’ 줍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시인이 권하는 ‘도토리농법’을 따라 하면 해답이 나올 듯도 합니다.

희한한 일이지

이게 왜 아까는 안 보였을까

그렇게 샅샅이 훑고 뒤졌는데

왜 안 보였을까

산보 삼아 도토리나무 밑을 어슬렁거리며

도토리 주워보지만

낙엽 속에 숨은 도토리는

이쪽에서 보면 보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아주머니들 아침이면

죽 훑어 산을 오르지만

보는 만큼 줍고

보이는 만큼 줍는 일이지

안달하며 죄 주우려고 머무는 법은 없다

오늘 안 보인 것은 내일 보이고

내가 못 본 것은 남이 보고

그래도 안 보이는 것은 낙엽에 묻혀

다람쥐도 먹고 벌레도 먹는다

-‘도토리 농사2’

다람쥐와 사람이 공존하는 ‘하늘농사’를 깨우친 시인의 자연농법이 사뭇 넉넉하지 않습니까. 앗, 어서 하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잣나무 함부로 차지 말라”고 아까부터 머리 위에서 다람쥐가 노려보고 있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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