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붓질한 상실의 풍경화
슬픔을 붓질한 상실의 풍경화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5.05.17 1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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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추천 -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

 [화이트페이퍼=북데일리] 사랑하는 아내와 태어난 지 세 달 된 아이를 두고 자살을 선택한 남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바다출판사. 2014) 속 이야기다. 유미코는 재혼해 평탄하게 살고 있지만 여전히 7년 전 남편의 그림자를 버릴 수 없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열차를 향해 걸어간 남편의 심연에 닿고 싶은 마음이 젊은 아내를 흔든다. 전 남편을 향한 그녀의 독백은 아스라이 희미해진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고야 만다.

 ‘추위도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저는 내버려진 어선에 달라붙은 채 오랫동안 겨울 바다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다의 흔들림과 함께 제 몸도 흔들흔들 흔들렸습니다. 아마가사키의 그 터널 나가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이제 아무래도 좋아, 행복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죽는다고 해도 좋아. 뿜어져 올랐다가 흩어져 날아가는 커다란 파도와 함께 그런 생각이 자꾸만 가슴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것을, 저는 그때 확실히 실감했던 것입니다. 아아, 당신은 얼마나 쓸쓸하고 불쌍한 사람이었을까요. 눈물과 흐느낌, 저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언제까지고 울었습니다.’ (「환상의 빛」, 60쪽)

 온통 상실의 슬픔으로 채워졌지만 아름다운 한 편의 풍경화로 다가온다. 유미코가 바라볼 바다를 상상하게 만드니 말이다. 가만히 바라보면 자석에 끌린 듯 겨울 바다에 빠져드는 느낌이라고 할까. 누구와도 나눌 수 없었던 남편의 감정이 전해서 눈물을 터트리고 마는 아내의 독백은 가슴을 파고든다.

 ‘가만히 시선을 주고 있으니 잔물결의 빛과 함께 상쾌한 소리까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곳만은 바다가 아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부드럽고 평온한 일각처럼 생각되어 흔들흔들 다가가고 싶어집니다. 그렇지만 미쳐 날뛰는 소소기 바다의 본성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잔물결이 바로 어둡고 차가운 심해의 입구라는 것을 깨닫고 제정신을 차릴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아, 역시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네요. 이야기를 시작하면 가끔 몸 어딘가에서 찡하니 뜨거운 아픔이 일어 기분이 좋습니다.’ (「환상의 빛」, 82쪽)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다. 존재와 부재 사이에 수많은 기억들로 생을 견디기도 한다. 단편「밤 벚꽃」의 주인공 아야코도 죽은 아들의 1주기에 찾아온 전 남편을 통해서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젊은 시절 몰랐던 삶의 아름다움 말이다. 벚꽃 때문에 자신의 집으로 신혼여행을 온 젊은 부부를 통해 아야코는 과거를 본다. 다시 불러올 수 없는 철없던 시절이라 그 소중함을 알지 못했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져버리는 활짝 핀 벚꽃을, 아야코는 툇마루에 앉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일찍이 이렇게 숨을 죽이고 바라본 적은 없었다. 부풀어 오른 엷은 분홍색의 커다란 면화가 파란 빛의 테두리를 두르고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톡톡, 톡톡 줄어가는 요염한 생물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아야코는 도저히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신기한 밤을, 벚꽃과 함께 깨어 있자고 마음먹었다. (「밤 벚꽃」, 109쪽)

 모든 생이 그렇게 흘러간다. 야속하게도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 가치를 깨닫는다. 그래서 사는 동안 어떤 이의 죽음을 껴안기도 한다. 불륜 상대 요코를 만나러 가는 길에 친하지 않았던 친구의 죽음을 듣는 「박쥐」 , 출장을 위해 탄 기차 옆 칸의 할아버지의 울음소리를 통해 어린 시절 죽은 친구를 떠올리는 「침대차」는 가깝거나 먼 이들의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미야모토 테루는 네 편의 소설을 통해 잔잔하고 담백하게 죽음과 삶에 대해 말한다. 그것이 우리네 생이라고 알려주는 듯하다. 어떤 죽음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런 과정을 반복해서 경험하는 게 삶이라는 걸 아름답게 그린 소설이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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