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퇴진, 재계 총수들의 잔혹사
박용성 퇴진, 재계 총수들의 잔혹사
  • 장윤영 화이트페이퍼 발행인
  • 승인 2015.04.23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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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영 칼럼] 이건희 구자경 최종현 등 설화(舌禍)로 곤욕치러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회장 재임시 이따금 돌출발언으로 곤욕을 치렀다. 그 때마다 뒷수습을 해야하는 그룹 홍보라인은 언제 어디서 폭탄발언을 할 지 모르는 회장의 일거수 일투족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당시 그들 사이에는 ‘회장님은 (입이) 터졌다하면 실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젼경련 회장 시절인 1980년대 말 당시 강성노조문제로 시끄러웠던 특정 언론사들을 거명하면서 그런 언론사들은 망해야 정신을 차린다는 발언을 했다가 해당 언론사의 격렬한 항의를 무마시키느라 본인도 진땀을 빼야 했다.

설화의 하이라이트는 90년 겨울 청와대 준공식 행사 때였다. 재계총수들이 빠짐없이 모인 그 자리에서 구회장은 '과거 군사정권은 독재정권' '쿠테타’라는 당시 상황에선 금기어나 다름없는 말들을 취중에 쏟아냈다가 육사 출신 대통령의 노여움을 샀다. 환영 만찬장의 분위기가 어떻게 돌변했을 지는 미루어 짐작이 간다. 이후 그는 이른바 ‘청와대 출입금지’ 신세가 됐다. 전두환 정권 때 ‘괘씸죄’로 해체된 국제그룹의 악몽이 가시지 않았던 ‘닮은 꼴 정권’의 시절에 그런 일을 당한 구 회장은 이후 체중이 급격히 줄고 자주 식은 땀을 흘리는 등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는 후문이다.

정권이 바뀌고 ‘노태우 비자금사건’ 재판이 열리면서 그 내막이 세간에 알려졌는데 구 회장은 삼촌인 구평회 LG상사회장을 통해 훗날 140억원의 비자금을 챙겨주는 것으로 간신히 ‘윗분’의 노여움을 풀었다. 구회장의 당시 폭탄발언을 놓고 ‘취중진담’이었냐 ‘술주정’이었냐라는 씁쓰레한 설전이 오간 것도 그 즈음이었다.

재계의 대표적인 학구파로 통했던 고(故) 최종현 선경그룹(현 SK) 회장은 평소 해박한 논리로 정부의 반시장적 정책에 소신발언을 편 것으로 유명하다. 1992년 1월 당시 이용만 재무장관과 금리인하라는 논쟁적 이슈를 놓고 정면대결을 펼쳐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그는 95년 전경련회장 재선임 자리에서 정부의 경제정책을 강한 톤으로 비판했다가 호된 시련을 당했다. 청와대와 관료집단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그는 바로 다음날 홍재형 당시 경제부총리를 찾아가 말뜻이 오해된 것이라며 진화하려 애를 썼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경제검찰로 불리던 공정거래위원회가 선경그룹의 내부 불공정거래 행위에 대해 대대적으로 조사했다. 소신발언 이후 일주일만에 돌아온 ‘괘씸죄’의 부메랑이었다.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재계총수의 대표적인 설화 사례는 이건희 삼성회장의 이른바 ‘북경발언’이다. 문민정부가 출범의 캐치프레이즈로 ‘신경제’를 내세우자 ‘신경영’이라는 그룹 슬로건으로 화답하며 경영현장을 진두지휘했던 이 회장은 95년 4월 북경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기업은 2류, 관료와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문제의 작심발언을 한다. 청와대, 특히 YS의 진노는 대단했다. 삼성이 어떤 그룹인가. 그 막강한 조직력과 로비력을 총동원해 YS의 공식, 비공식라인을 접촉, 이회장 발언의 진의를 해명하며 파문을 수습하려 애를 썼지만 통하지 않았다. 평소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골목대장 성격에, 정치적 영웅주의심리가 강했던 YS로서는 ‘정치는 4류’라는 이회장의 발언은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들렸을 지 모른다. 파문은 시간이 흐르면서 진화되긴 했지만 문민정부 출범초기 밀월관계를 이루었던 삼성은 이후 정부의 ‘보이지않는 압박’에 시달리고 신경영 추진전략에도 일정 부분 차질을 빚게 됐다.

92년 대선에 도전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출마의 변, 유세장에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초대형 설화나 다름없었다. 대선 패배 후 그 대가는 혹독했다. 대선 과정서 ‘권력과 돈을 다 갖겠다는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했던 YS의 분노에 찬 집념은 대통령 당선 후 응징의 형태로 행동화됐다. 노(老)회장은 YS 임기 내내 수 십차례 검찰청사를 들락거리며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고, 현대는 존폐의 위기 속에서 고강도 세무조사 등 정부의 융단폭격을 5년간 감내해야 했다.

조석래 효성회장은 전경련 회장시절인 2007년 제주도서 열린 하계 CEO포럼서 ‘차기 대통령은 경제를 아는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가 구설에 휘말렸다. 전경련 회장으로서 답답한 마음에 한 말이었지만 당시 대선후보였던 이명박 대통령과 사돈지간이란 이유로 따가운 눈총을 받았고, 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중앙대 재단이사장이었던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이 이메일 막말 논란의 책임을 지고 얼마 전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내가 목을 쳐주겠다’는 섬뜩한 표현이 담긴 이메일 파문은 형식상 필화(筆禍)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막말이 빚어낸 설화에 가깝다. 몇 달 전 이른바 ‘땅콩리턴’사건이 한바탕 여론의 십자포화를 받은 터여서 오버랩되는 이미지가 심상치 않다. 이미 대학 교수 비대위측은 ‘대학판 조현아 사건’이라며 여론몰이를 시도하고 있고, 두산그룹은 파문의 불똥이 그룹 쪽으로 튈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양새다.

박 회장의 퇴장은 그가 경영자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거침없는 언변으로 ‘재계의 미스터 쓴소리’라는 애칭이 붙여졌던 인물이었기에 더욱 초라하게 느껴진다. IMF(국제통화기금) 직후 알짜배기 기업을 팔도록 독려한 DJ에게 ‘나에게 걸레면 남에게도 걸레다’라는 소위 ‘걸레론’으로 화답했던 그의 어록엔 ‘떼법론’‘들쥐론’‘왕사쿠라론’‘곰탕론’‘4형제론’ 등 해박한 지식과 유머감각이 빚어낸 특유의 독설이 가득차 있다.

재계의 독설가로 이름을 날렸던 박 회장이 이번 사태로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 독설, 아니 막말의 수위가 상식의 범주를 한참 벗어났기 때문일게다.

대학조직에 기업식 구조조정을 접목시키려던 박회장의 의지와 노력 자체가 싸잡아 매도당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도를 넘은 막말로 인해 대중의 여론이 먼저 등을 돌린 모양새가 과거 재계 총수들의 설화 사건과 비교된다.

일부 재계총수들은 비록 치명적인 설화로 정치권의 괘씸죄에 걸려들어 고초를 겪었지만 올바른 지적, 용기있는 발언이라는 당대 여론의 호응이 뒤따랐던 게 사실이다.

그 경우 훗날 달리 평가받을 수도 있다. 꼭 2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세월호 비극을 다루는 글들에 자주 인용되는 이건희 회장의 북경발언이 대표적인 예다.

문학은 향기를 잃으면 잡문(雜文)으로 격이 떨어진다. 지나친 비유일 수 있지만 독설도 독설다우려면 최소한의 품격과 향기가 배어 있어야 한다. 박회장의 경우 독설이 지나쳐 저주어린 막말이 되고 그 결과 품격도, 향기도, 여론의 호응마저도 잃은 모습이다. 때와 장소를 가려야 했던 건 아닌지, 정제되고 순화된 언어를 사용하면 안 되었는지 아쉬울 따름이다. 그가 이끌어 가고자 했던 방향이 올바른 길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에겐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퇴장하는 그의 뒷모습이 더욱 쓸쓸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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