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사건과 낯선 만남, 그리고 욕망
우연한 사건과 낯선 만남, 그리고 욕망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4.12.14 22: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간결하고 건조하고 강렬한 소설들

[북데일리] “같이 저녁 드실래요?”

“그러죠.”

그는 즉시 대답했다.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 받침에 기댄 목덜미만 빠르게 돌리고 대답했다.

“그러죠.”

그게 전부였다.

어쩌면 그는 이 제안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는 그녀가 어떤 제안을 하든지 간에 받아들였을 것이다. (p.31~p.32) <금요일 저녁>중에서

프랑스의 여류작가 엠마뉘엘 베르네임 소설 4권이 세트로 나왔다. 각 작품의 제목은 <잭나이프>, <커플>, <그의 여자>, <금요일 저녁>(작가정신. 2014)이다.

베르네임은 20년 동안 100쪽 정도 분량의 짧은 소설을 써서 ‘100페이지의 작가’로도 불린다. ‘새롭고 독특한 문체’덕분에 그녀는 세 번째 소설 <그의 여자>로 1993년 ‘메디치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녀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모두 독신이다. 그녀들의 일상은 평범해 보이지만 한순간 기이하게 변해버린다. 결론도 모호하고 갑작스럽게 끝난다. 소설들은 대화체가 거의 없고, 문장은 아주 간결하고 객관적이다.

첫 번째 작품 <잭나이프>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십 년째 가방 안에 잭나이프를 가지고 다녔다. 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한 남자의 등을 찌르고 지하철에서 내린다. 며칠간 앓고 난 후 그녀는 두려움과 불안에 빠져 자신이 찌른 남자를 찾아 나선다. 영국에서 만난 그 남자 ‘세실 폭스’는 마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녀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된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를 떠나려 한다.

두 번째 소설 <커플>의 주인공 ‘엘렌’은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한다. 그녀는 한 저녁 모임에서 의사인 ‘로익’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녀는 그를 자신의 아파트로 초대한다. 그녀는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고, 피임 기구를 준비한다. 한편, 로익은 약속이 취소되어도 화를 내지 않는 그녀를 보고 다른 남자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로익은 그녀의 아파트에서 다른 남자의 흔적을 찾으려 화장실과 욕실을 샅샅이 살핀다. 그녀가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는지 의심하며 잠복근무를 하는 형사처럼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고 있기도 한다. 반복되는 오해와 기대 속에서 둘의 관계가 조금씩 진전되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

세 번째 작품은 <그의 여자>. 첫 문장부터 인상적이다.

“그녀는 핸드백을 도둑맞았다. 매일 아침 그렇듯 그녀는 그날도 스탠드바에서 아침을 먹었다. 그녀는 발밑 바닥에 핸드백을 내려놓고 토스트를 먹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늘 핸드백을 발목 사이에 끼워두었다. 그런데 핸드백이 사라진 것이다. 누군가가 가방을 빼내 갔는데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p.7)

서른 살의 내과 의사 ‘클레르‘는 어느 날 핸드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다음 날, 낯선 남자가 그녀의 핸드백을 들고 찾아온다. 남자의 이름은 ‘토마스 코바크’. 클레르는 그가 유부남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빠져든다. 그녀는 토마스와 만나고 진료실 책상 서랍 안에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칵테일을 저었던 노란색 플라스틱 막대, 각설탕, 샴페인 코르크 마개, 전화 응답기 테이프, 심지어 콘돔까지……. 클레르는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남자로 인한 공허함을 물건으로 채워 넣는다.

그녀는 오르한 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에서 사랑하는 여인 ‘퓌순’과 관련된 모든 물건을 수집하는 ‘케말’을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토마스는 독신이었고, 이제 그녀는 그의 아내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또 다른 남자의 성냥갑을 서랍에 모으는 것을 시작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다소 기이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결말이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기도 한 마지막 작품 <금요일 저녁>. 내일 아침이면 독신녀 ‘로르’는 남자친구 ‘프랑수아’의 집으로 이사할 예정이다. 그는 부유하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좋은 자동차를 소유한 의사다. 로르는 저녁 초대에 가기 위해 차를 몰고 나간다. 하지만 지하철 파업으로 차들이 꼼짝도 안한다. 그 와중에 낯선 남자를 차에 태워주게 되고 그녀는 그의 가죽잠바 냄새, 향수냄새, 담배냄새에 빠져들게 된다. 결국 둘은 호텔로 향하고, 다음 날 새벽 로르는 혼자 집으로 향한다.

베르네임의 소설들은 한마디로 모두 ‘소외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여성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이와 함께 ‘현대인의 일상과 사랑에 대한 환상’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문장이 간결하고 책 분량도 얇고 가벼워서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따라 하기 좋은 문체다. 새로운 형식의 소설을 원한다면 읽어볼 만하다. <정미경 기자>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