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규의 <네모>
네모
전축 앞에 서 있었다. 마치 하나의 네모처럼. 전축 앞에 거울이었다. 전축 앞에 서 있었다. 전축은 네모. 음악은 없었다. 물과 바람은 없었다. 나귀도 없었다. 전축 앞에 서 있었다. 너는 네모. 어떤 전축도 없었다. 아무 전축도 없었다. 나는 네모 앞에 있었다.
- 이준규 시집 <네모>, (문학과지성, 2014)
‘네모’라는 시는 마치 마술을 보는 것 같다. 눈 앞에 보이던 전축은 어느새 홀연 네모로 바뀌었다. 어떤 눈속임도 없어 보인다. 시인은 전축의 본질을 끄집어 내었을 뿐이다.
다른 의미에선 시의 연금술 같다. 순수하게 걸러진 예술적인 것이 반짝인다. 철학 같기도 하고 불성 같기도 하고, 아무튼 우리 안에 내재된 영혼 같은 것.
혹은 추상주의 그림. 전축에 음악이 없는 걸 봐서 칸딘스키는 아니다. 말레비치에 가깝다. 절대성의 네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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