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살스럽게 풀어낸 아픈 역사
익살스럽게 풀어낸 아픈 역사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4.10.06 21: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민석의 <풍의 역사>

[북데일리] 경험하고 기록한 것은 역사가 된다. 나의 역사가 나라의 역사란 말이다. 그러니 위대한 역사의 기록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어쩌면 실제 사건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기막힌 픽션인 최민석의 <풍의 역사>(민음사. 2014) 도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누군가의 삶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손자 이언이 들려주는 할아버지 이풍의 이야기다. 1930년 8월 15일에 태어난 할아버지 이풍은 미소년의 외모와 큰 키로 또래 소녀부터 유부녀까지 사랑을 받았다. 언제 어디서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풍의 눈에 들어온 여인은 수선, 이풍은 그녀를 밤이라 불렀다. 그녀와 이풍의 사랑을 질투한 앞잡이의 계략으로 강제 징집된다. 이렇게 이풍의 삶은 15년 뒤 광복을 시작으로 2차 세계대전, 6.25전쟁, 베트남 전쟁, 격동의 80년대를 지나 현재까지 이어진다. 그러니까 이풍의 삶엔 한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역사적 사건의 중심엔 항상 풍이 있다. 물론 그 옆엔 항상 그를 위험에 빠뜨리는 앞잡이가 있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장소에 둘은 언제나 함께다. 어떻게든 사랑하는 밤에게 돌아가기 위해 풍은 최선을 다했지만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포로수용소에서도 앞잡이는 그를 막고 있었다. 앞잡이가 풍을 위기로 몰아넣는다면 풍을 위로하고 동행하는 오 중사가 있다. 오 중사는 군대에서 알고 지냈던 후임으로 포로수용소에서도 함께 지낸이다. 고통과 기쁨을 나눈 사이다.

 ‘사람들이 풍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저 풍이 빚어내는 세계가 자신들이 그간 처하고 겪어 온 세계와 맞닿아서 익숙하면서도 왠지 새로웠고, 매일 보는 것이면서도 이상하게 못 본 것 같아서 좋았다.’(119쪽)

 작가 최민석은 너무나도 아픈 역사를 재치와 해학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재미있게 읽는 게 미안할 정도다. 풍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충실히 살았을 뿐이다. 계획한 대로, 소망한 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았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권력에 농락당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풍이 살아온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알 수 없다. 그저 수많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이 존재했기에 현재가 있다는 걸 짐작할 뿐이다.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가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게 만들었다면 최민석의 <풍의 역사>는 한반도를 너머 아시아의 역사를 들여다보게 한다. 거대한 역사가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풍의 이야기로 말이다. 최민석은 익살스럽게 건넸지만 허풍만 남은 건 아니다. 그의 말대로 삶은 이야기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계속된다.

 ‘삶은 이야기였다.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단지 이력서에 몇 줄 써질 경력에 불과하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밤하늘의 별처럼 잠들지 않게 하며, 이불을 덮고서도 그 속에 빠져 새벽을 맞게 하는, 즉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누구에게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여 여전히 흘러가고 있기에, 또 하루를 온전히 살게 하는 바로 그 이야기였다.’(277쪽)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