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공포' 복원하다
'1980년대의 공포' 복원하다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4.09.17 16: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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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소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소재

‘어떤 사람에게 역사는 그저 저만치 지나가는 행인이지만,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협잡꾼이고 폭력배이며 살인마다.’ (신형철의 추천사 중에서)

 [북데일리] 역사라는 무대에서 민중은 주인공이 아니다. 주인공은 때로 전쟁이며, 쿠데타며, 학살이다. 그들의 역할이 분명한 단역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역사도 다르지 않다. 특히 1980년대가 그러하다. 그 시절은 누구에게나 잔혹한 이미지로 남는다. 과거가 되었지만 여전히 통증은 지속된다.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민음사. 2014)는 그 시절의 이야기다.

 주인공 나복만은 고아원 출신으로 원주에서 택시기사로 일한다. 애인 김순희와 동거하며 결혼을 꿈꾸는 소박한 청년이다. 그런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경찰과 형사의 감시 대상이 된다. 나복만은 택시 운전 중 사소한 사고를 내자 자진하여 경찰서에 신고를 했을 뿐이다. 글을 몰랐기에 교통과가 아닌 정보과를 찾은 게 불운의 시작이었다. 당시 원주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범이 도피처였다. 원동 성당 최기식 신부의 권유로 모두 자수하였다. 이쯤에서 그 사건은 마무리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군사 정권을 향한 과잉된 충성이 나복만의 삶을 뒤흔들었다. 정보과 형사들은 나복만을 그 사건과 결부시켰다.

 ‘그는 억울했다. 그러나 억울함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죄였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것은 분명 ‘아는 ’죄와는 다른 것이었다. 하나의 걱정이, 모든 것의 걱정으로 변화되고, 하나의 두려움이, 수십 가지의 두려움으로 연결되어 버리는 마법.’(60쪽)

 나복만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신문에 이름이 실린 것도 몰랐다. 경찰과 정보과 직원이 자신과 관련된 모든 걸 감시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연락이 닿은 적 없는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왔으며, 자신이 원동 성당의 신부들의 지시를 받는다는 소설을 쓸 수도 있다는 몰랐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아무것도 읽을 수도 없는 세계. 눈앞에 있는 것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해 버리는 세계, 그것을 조장하는 세계(전문 용어로 ‘눈먼 상태’되시겠다.), 그것이 어쩌면 차남들의 세계라고 말해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179쪽)

 1980년대 안기부에선 모든 게 가능했다. 협박과 회유로 시작하여 끝내는 고문으로 모든 걸 인정하게 만들었다. 진실을 알리려는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랬다. 나복만은 아주 쉬운 상대였다. 부모 형제 없는 고아였고 글도 모르니 없는 죄를 만들기에 적절했다. 안기부 직원이 써 준 글을 그대로 옮기고 모든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안기부 직원을 태우고 택시를 몰던 그가 전봇대를 들이받고 사라진 건 가장 잘한 일인지도 모른다. 평생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살아야 하는 운명을 선택한 것이다.

 이기호는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유쾌한 톤으로 비통한 마음을 감춘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자, 이것을 다시 왼쪽으로 모로 누운 채, 한번 들어 보아라. 자, 다들 인상 펴고 이것을 계속 들어 보아라. 자, 이것을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를 떠올려 보며 들어 보아라.’ 소설을 통해 그들의 심경을 대변하는 듯하다.

 원주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이 소설은 소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누군가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알려준다. 절대로 그런 삶이 존재하는 세상은 없어야 한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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