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언어가 봉인된 시 편지
비밀의 언어가 봉인된 시 편지
  • 장맹순 시민기자
  • 승인 2014.09.15 2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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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상 시집<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가 고등학생일 때 계엄군이 나의 시를 검열했다. 나는 한 편의 시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나의 시를 내가 검열한다."-시인의 말 중에서
 
[북데일리] 80년대 광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윤희상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문학동네.2014)이 나왔다. 이번 시집에는 소박한 풍경과 일상 사이를 단아하게 담아낸 66편의 시들이 그 대신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시인의 말은 낮은 데로 향한다. 누가 들어도 쉽다. 그래서 누구나 무릎맞춤 할만하다. 시편마다 자신만의 목소리를 담지만 결코 다 말하는 법이 없다. 그가 시 곳곳에 남겨놓은 속내는 지금부터 독자가 알아채야 할 몫이다.
 
 "눈 내리는 날/ 한 가운데  텅 빈 마음자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스산한 바람만 불었다/ 비움으로 끝내는 남아 있는/ 중심의 괴로움을 처음에는 몰랐다/(중략)// 너와 내가 하나이듯이/ 빛과 어둠이 하나이듯이/ 밤과 낮이 하나이듯이"(도너츠)부분
 
 가운데가 뚫려있는 도너츠의 모형과 텅빈 마음자리는 같지만 다른 느낌이다. 물성(物性)에서 심성(心性)으로 바뀌는 순간 말은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쉬운 언어에 담긴 말의 비밀을 무엇일까. 
 
 "봄을 지나 꽃 떨어졌다/ 여름을 견디며 살았다/ 나는 너를 키우고 너는 나를 키웠다/ 그렇게 만나 함께 살았다/ 너 없이 나 없고 나 없이 너 없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어찌 생각해보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나라고 할 것도 없고 너라고 할 것도 없다"(사과와 사과씨)부분
 
 사과꽃이 피어 사과가 될 때까지 하나이면서 둘이고 같으면서 다르다는 게 시의 설명이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황현산 문학평론가의 말에 따르면 진정으로 아는 자들은 어둠이 대신해서 말하게 하는 자들이라 했다. 시인은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곳곳에 여지를 남겨두고 볼 뿐이다.
 
 "자고 일어나 방문을 열면 감나무 밑이 환했다. 아침마다/ 누나와 함께 떨어진 감꽃을 주웠다 꽃밭에서/ 피는 꽃마다 하늘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꽃이 지면/ 들고 있던 하늘도 무너졌다 아버지의 양복 호주머니에서/ 돈을 훔쳤다 훔친 돈을 담장 기왓장 아래/ 숨겼다 앵두나무 그늘이 좋았다 둥근 그늘 밑으로/ 들어가 돗자리를 깔았다 해 질 무렵, 어머니가/ 이름을 부르며 찾았다 대답하지 않았다 뒤뜰에서/ 죽은 것처럼 누워 있었다 비가 오면, 마당의/ 백일홍 나무는 비가 오는 쪽만 젖었다."(갈 수 없는 나라)전문
 
 아침마다 감꽃을 줍는 남매, 아버지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훔친, 앵두나무 그늘과 그 속에 눕기, 어머니가 불러도 모르척하기, 비 오면 한쪽 젖는 백일홍나무. 여러 조각의 에피소드가 모여 하나의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이 시는 독자로 하여금  벗어날 수 없는 불만과 다른 세계가 겹쳐진 백일홍 나무를 보게 한다.
  
 특히 이 시집에는 쉬운 언어 속 비밀처럼 시인의 가족에 대한 시도 들어있다. "조선 남자를 사랑한 일본 여자가 사는 집은 우리집이고 그 일본 여자가 나의 어머니“다. 이처럼 그의 시는 담담하면서도 단아하고 올곧다. 그래서 더 궁금하게 만든다. 그가 남겨둔 여백이 궁굼하다면 이 가을날 봉인된 편지를 개봉하듯 한 번 열어 보시라.<장맹순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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