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맛, 맛 '혀끝의 인문학'
맛, 맛, 맛 '혀끝의 인문학'
  • 정미경 기자
  • 승인 2014.05.19 0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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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맛, 고상한 맛, 황홀한 맛

[북데일리] <18세기의 맛, 부제: 취향의 탄생과 혀끝의 인문학>(문학동네. 2014)은 ‘맛’을 키워드로 18세기의 문화현상을 소개하는 책이다. ‘맛’의 역사와 시대상에 맞춰 동서양의 ‘맛’에 얽힌 흥미로운 문화사를 들려준다.

 18세기는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고급스런 음식이 대중화되고, 먹고살기 위해 먹던 것에서 ‘맛’의 차원으로 변화하던 시기다. 또한 저급한 감각으로 치부되어 왔던 맛에 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문화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와 함께 금욕과 절제의 분위기에서 벗어나 욕망을 추구하고 소비를 과시하는 취향의 대중화가 시작된 시대도 바로 이 때다.

책은 식재료와 양념, 술과 차, 사치 음식과 구황 음식, 미식가의 진수성찬과 소박한 서민의 식탁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어떤 맛은 죄의 사함을 받아야 했고, 어떤 맛에는 목숨을 걸어야 했으며, 또 어떤 맛은 국가의 통치 도구로도 활용됐다.

“우리나라 사람이 서양요리를 좋아하려면 결국 우리 혀가 버터에 완전히 익숙해져서 버터가 맛있다고 느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서양요리 대부분의 소스에 사용되는 버터는 마치 우리 음식에 들어가는 장醬과 같은 역할을 한다. 외국인이 우리 음식에 맛을 들이려면 간장, 고추장, 된장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p.13)

중앙아시아 유목민이 처음 개발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된 버터. 한때는 이 버터를 사용하는 데도 교황청의 면죄부가 필요했다. 이전에는 유럽 요리에 올리브기름이 많이 쓰였지만, 어느새 사람들은 버터의 부드러운 맛에 중독되어갔고, 금식기간 중에 버터를 사용하려면 교황청의 특별한 허가가 필요했던 것. 헌데 교황청은 이 면죄부를 발행해주는 대신 많은 돈을 챙겼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옷 입는 방식에 대해 관여하시지 않는다”는 루터의 주장을 볼 때 이 문제는 종교개혁 당시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또한 유럽인들이 홍차에 타 마셨을 뿐 아니라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데 쓰인 최고의 사치품 설탕. 그것은 사탕수수농장에서 착취당하던 노예들의 희생과 죽음을 대가로 즐긴 것이었다.

“설탕을 얻기 위해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이를 가공하려면 어마어마한 자원과 인력이 필요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농경지를 찾아야 했고, 엄청나게 큰 용광로에서 설탕을 끓이기 위해 땔감으로 쓸 나무를 확보해야 했으며, 이런 일을 할 수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중략) 끌려간 노예들은 견디기 힘든 기후와 용광로의 엄청난 열기로 고통받았다. (중략) 설탕의 달콤한 맛은 흑인 노예가 맛본 온갖 고통의 대가였다.” (p.24~p25)

특히 진(gin)과 맥주, 두 가지 술은 먹을거리를 규제하거나 권장하면서 국민을 좌지우지했던국가의 통치술을 보여준다. 18세기 초반에 값싼 증류주가 대량 공급되면서 영국에는 ‘진 광풍Gin Craze'이 불었다. 이는 빈민가를 휩쓸었고 알코올 과잉섭취라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결국 영양 상태도 좋지 않은 노동자들이 독한 술로 인해 생산력을 잃어가자 국가는 극단적인 주세법과 여러 가지 정책을 동원해 진을 규제하게 됐다. 그러나 관리 가능한 취기를 적당히 제공하며, 비위생적인 물의 대체제로 훌륭하게 쓸 수 있던 맥주는 진과 달리 오히려 국가가 권장한 영국의 음료수였다. 맥주는 곧 대영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신의 축복과도 같은 음료였다.

“맥주의 맛은 개인적·국가적 ‘건강’을 이루는 신성한 맛이며, 자유와 사랑이라는 이념과 정서로 공동체를 아우르는 맛이다. 건강, 활기, 축제와 같이 맥주가 수반하는 긍정적인 개념들은 맥주 산업이 국가에 가져다주는 경제적 번영과 무관하지 않으며 맥주의 맛은 이러한 번영에 대한 직관적 묘사라 할 수 있다.” (p.112)

이외, 책에는 18세기 조선에서는 ‘복생선鰒生鮮’ 또는 ‘하돈河豚’이라 불렸던 복어는 중독사고가 잦아 사대부들 사이에서 일었던 논쟁도 소개된다. 복은 독이 강해지기 전 봄철 복사꽃이 지기 전에 먹어야 했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또한 홍차, 커피, 와인, 감자, 고추장, 쇠고기 환약까지 다양한 메뉴가 뷔페식으로 펼쳐진다.

이 책은 한국과 세계의 18세기를 연구하는 ‘한국18세기학회’의 인문학자 23명이 쓴 글들을 엮은 것이다. 책에 실린 글은 2012년 9월부터 2013년 7월까지 네이버캐스트에 연재됐다.

처음 책을 접하고 다소 딱딱하고 질긴 논문식의 글들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는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내용들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책을 통해 여러 가지 맛 이야기로 다양한 메뉴의 밥상을 차려낸 저자들의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물론 아주 맛깔난 음식도 있고 조금 밍밍한 것도 있다. 가장 황홀한 맛을 선사하는 메뉴는 뭔지 찾아보는 일도 즐거움을 준다.  <정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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