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에서 한 발 물러나 보기
익숙함에서 한 발 물러나 보기
  • 장맹순
  • 승인 2014.04.19 0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병완 시집< 빈말과 헛말 사이에 강이 흐,>

[북데일리] 그림 그리는 동양화가 조병완의 첫 시집<빈말과 헛말 사이에 강이 흐,>(시인동네.2014)이 나왔다. 등단 15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엔 일상에 밑바닥에 고인 삶의 진실을 새로운 형식으로 길어 올린다. 오랜 시간 그림을 그려온 화가답게 형식미에 골몰하며 우리 시가 외면해온 형식적 실험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인다. 

"대낮부터 예비 된 밤은 깊게 고랑이 졌, 청주에서 안성까지 도/ 로 깊은 고랑, 기억은 고랑으로 빠져 사라졌, 네게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 사과할 줄 모르는 기억과 용서할 수 없는 기억 사이에서 밤의 고랑은 깊어졌, 계절을 업고 네 위를 건너야 했,/너는 징검다리로 길게 누워 무심하였, 계절은 자꾸 흘러내리고 /청량한 물을 먹고 싶었, 선운사 동백은 아직 피지 않았다 했, 나리나리개나리 어른나리개나리, 아으다롱다리 꽃잎은 내려앉았, 숨을 내쉴 때마다 가슴에서 모래가 쉬르르르 쓸려 다녔, 밤/은 파들거렸, 함박눈이 날리듯 밤은, 검붉은 꽃잎으로 파들거리/며 내 위에 얹혀졌, 손발을 움직일 수 없는 몸, 꽃잎 아래 파묻혔,깊이 묻혔," ('꽃잎의 밤' 전문.15쪽)

시인은 단어와 단어 사이에 쉼표를 찍어 놓는가 하면 행과 행 사이를 멀찍이 띄어 놓는다. 부러 찍어놓은 쉼표가 불편하다. 끊어지는 호흡 때문에 답답증이 일고 외려 숨이 가쁘다. 말과 말 사이, 행간을 읽어내는데 무수한 쉼표는 쉬지 못하게 한다. 시인만이 의도한 작전일까. 심지어 동사까지 생략해 사물의 생김새와 움직임을 추측하며 그려내게 한다. 예를 들면 "밤이 되었, 광막한 입구, 어둠이 아내와, 딸과 호프집에 앉, 발랄과 우울이 앉아 서로를" 와 같이 말이다. 

이런 시도를 통해 시인은 하찮은 생명에 대한 옹호와 비루한 세상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보인다. 시집엔 새로운 형식을 통해 익숙한 것들로부터 한 발 물러서게 하여 너무 가까워서 볼 수 없었던 인간의 욕망과 삶을 진솔하게 돌아보게 한다.

 시인은 전북 고창 출생으로 1999년 '시와 반시'에 <옴니버스 회화>외 4편으로 등단했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에서 동양화 공부를 했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