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라는 생생한 재난 앞에...
현실이라는 생생한 재난 앞에...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3.11.12 1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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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

 

[북데일리] 예기치 못한 사고, 질병은 모두에게 닥칠 수 있다. 내가 아닌 남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위무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타자의 시선에서 누군가의 불행은 안타까운 감정,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2013. 민음사)속 인물들도 다르지 않다.

 주인공 요나는 정글이란 여행사에 근무한다. 정글에서 요나가 기획하는 여행상품은 재난 여행이다. 말 그대로 지진, 태풍, 가뭄, 화산, 쓰나미, 해일 이 발생한 재난 지역을 여행하는 것이다. 10년 동안 근무한 요나는 정글에서 퇴출 대상으로 상사 김으로부터 성추행까지 당한다. 정글에서 최대 위기에 처한 요나에게 김은 휴가 겸 출장을 권한다. 기획자가 아니라 여행자가 되어 재난 상품을 검토해보라는 것이다.

 ‘재난이 한 세계를 뚝 끊어서 단층처럼 만든다면, 카메라는 그런 단층을 실감하도록 돕는 도구였다. 카메라가 찰칵, 하는 순간 그 앞에 찍힌 것은 이미 인물이나 풍경이 아니다. 시간의 공백이다. 때로는 지금 살고 있는 시간보다 짧은 공백이 우리 삶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요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여행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출발선을 넘은 게 아닐까, 하고. 여행은 이미 시작된 행보를 확인하는 일일 뿐.’ 35쪽

 요나가 선택한 여행지는 ‘사막의 싱크홀’ 란 상품으로 베트남 남부의 무이라는 섬이다. 5박 6일의 일정으로 섬의 사막에 위치한 싱크홀을 둘러보고 홈스테이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더 이상 재난 지역이 아니었다. 재난을 이용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불편할 뿐이다. 요나는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그만 일행과 헤어지고 만다. 신분증과 여권도 없이 무이로 돌아온다. 리조트 매니저는 요나가 정글의 직원임을 확인하고 무이를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부탁한다. 더불어 리조트와 무이를 지배하는 폴에 대해 들려준다. 요나가 여권도 역시 폴에게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요나는 새로운 재난 시나리오를 만드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재난 여행을 준비할 때는 어느 각도로 칼을 들이대도, 누구나 감동하고 슬퍼할 만한 재난의 단면들이 나타나도록 고심해야 한다. 사람들의 동공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강렬한 이미지다.’ 145쪽

 요나는 럭이라는 청년의 도움을 받아 무이 곳곳을 둘러보며 그곳의 진짜 삶과 마주한다. 어디든 폴의 그늘에 있었다. 폴이 기획한 시나리오는 끔직했다. 무이의 개발을 위해 허위 재난을 만들면서 걸림돌이 되는 가난한 하층민인 수상 가옥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사막에 거대한 구멍을 파는 도구이자 재난으로 발생할 갖가지 사연의 희생자로 말이다. 누군가는 폴의 계획대로 이미 재난을 위해 죽었고, 곧 죽을 것이었다.

 ‘사람들은 과거형이 된 재난 앞에서 한없이 반듯해지고 용감해진다. 그러나 현재형 재나 앞에서는 조금 다르다. 이것이 재난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해도 방관하거나, 인식하면서도 조장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싱크홀은 저편 사막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175쪽

 무이에서 재난은 곧 현실이었다. 어디 무이 뿐일까? 소설 속 직장이 정글이듯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작가는 우리의 삶을 정글이라 단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낸 건 아닐까.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재난은 이미 현실에서 발생하고 있다. 긴 불황으로 이어진 청년 실업, 불안한 직장 생활, 거대 권력 앞에서 무너지는 소시민의 삶, 우리가 사는 곳이 무이와 다르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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