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봄에 읽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을까
이 봄에 읽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을까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3.05.15 14: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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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 아릿하고 절절한 봄 노래하다

 

[북데일리] <추천> 꽃이 지는 계절이다. 이 계절을 누군가는 봄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여름이라 부를 것이다. 봄이면 어떻고 여름이면 어떠랴. 꽃이 피고 지는 풍경에 빠져들 수 있으면 그만이다. 여기 꽃비가 내리는 모습을 고스란히 시로 담은 시집이 있다. 이은규는 <다정한 호칭>(2012. 문학동네)에서 꽃, 바람, 나비, 구름을 노래한다. 이 계절과 닮은 시는 이렇다.

 떠나옴과 떠남이 붐비는 소읍의 터미널 / 얕은 담장 너머로 백작약 말이 없다 // 저 꽃의 말은 수줍음이라는데 / 꽃말마저 버린 꽃의 얼굴처럼 / 언저리에 머무는 그들이 희게 시리다 // 방금 출발한 차편에 / 반생(半生)이라는 이름의 그가 타고 있다 / 이제는 지난 생이라 불러야 하나 / 마음 놓고 수줍을 수도 없었던 때가 길었다 / 남은 수줍음마저 꽃그늘에 부려두고 가야할 지금 / 버리다와 두고 가다 라는 말의 간격이 길다 / 모퉁이를 막 돌아나가려는 버스 / 그 순간을 마주하지 못해 고개 돌렸을 때 / 백작약 거기 있었다, 피었다 // 말을 버린 것들은 왜 그늘로 말하려는지 /끝내 전해지지 못한 말들이 / 명치그늘로만 숨어들어 맴돈다 / 허공 속 꽃의 향기가 다만 바람으로 차오를 뿐 // 모퉁이를 빠져나가던 반생이 손을 흔들 때 / 나는 배후마저 잃은 하나의 풍경이 된다 /마련된 인사가 없는 배웅 // 순간은 얼마나 긴 영원인가 // 다시는 배웅할 수 없는 지난 생이 / 천천히 소실점으로나마 사라지고 / 아픈 피를 해독한다는 백작약 앞에 선다 /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 ‘꽃그늘에 후둑, 빗방울’ 전문, 100~101쪽)

 짧은 봄을 보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일은 때로 본능처럼 다가온다. 시는 백작약이 피는 공간에서 누군가 이별하는 상상한다. 헤어지는 일보다 기억에서 지워진다는 게 더 슬프다는 자명한 사실은 이런 시로 이어진다.

 때로 헤어진 줄 모르고 헤어지는 것들이 있다 // 가는 봄과 / 당신이라는 호칭 /가슴을 여미던 단추 그리고 속눈썹 같은 것들 // 돌려받은 책장 사이에서 만난, 속눈썹 / 눈에 밟힌다는 건 마음을 찌른다는 것 / 건네준 사람의 것일까, 아니면 건네받은 사람 / 온 곳을 모르고 누구에게도 갈 수 없는 마음일 때 / 깜박임의 습관을 잊고 초승달로 누운 // 지난봄을 펼치면 주문 같은 단어에 밑줄이 있고 / 이미 증오인 새봄을 펼쳐도 속눈썹 하나 누워 있을 뿐 // 책장을 넘기는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은 /출처 모를 기억만 떠나는 방법을 잊었다 // 아지랑이의 착란을 걷다 / 눈에 든 꽃가루를 호ㅡ하고 불어주던 당신의 입김 / 후두둑, 떨어지던 단추 그리고 한 잎의 속눈썹 / 언제 헤어질 줄 모르는 것들에게는 수소문이 없다 / 벌써 늦게 알았거나 이미 일찍 몰랐으므로 /혼자의 꽃놀이에 다래끼를 얻어온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 올 것은 온다는 역설처럼 당신의 입김 없이도 봄날은 간다 // 화농의 봄, 다래끼 / 주문의 말 없이 스스로 주문인 마음으로 / 한 잎의 기억을 /당신 이마와 닮은 돌멩이 사이에 숨겨놓고 오는 밤 / 책장을 펼치면 속눈썹 하나 다시 뜨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올 거라 믿는, 꽃달 ( ‘속눈썹의 효능’ 전문, 68~69쪽)

 이은규는 봄이라는 계절을 가장 잘 표현하고 노래할 줄 아는 시인이다. 시집에 수록된 아름다운 시가 많지만 봄을 떠나보내는 마음을 이런 시로 달래본다.

 저만치 나비 난다 / 귓바퀴에 봄을 환기시키는 운율로 // 흰 날개에 / 왜 기생나비라는 이름이 주어졌을까 / 색기(色氣)없는 나비는 살아서 죽은 나비 / 모든 색을 날려 보낸 날개가 푸르게 희다 /잡힐 듯 잡힐 듯, 읽히지 않는 나비의 문장 위로 / 먼 곳의 네 전언이 거기 그렇게 일렁인다 /앵초꽃이 앵초앵초 배후로 환하다 /바람이 수놓은 습기에 / 흰 피가 흐르는 나비 날개가 젖는다 / 젖은 날개의 수면에 햇살처럼 비치는 네 얼굴 / 살아서 죽을 날들이 잠시 잊힌다 // 봄날 나비를 쫓는 일이란 / 내 기다림의 일처럼 네게 닿는 순간 꿈이다 / 꿈보다 좋은 생시가 기억으로 남는 순간 / 그 시간은 살아서 죽은 나날들 / 바람이 앵초 꽃잎에 앉아 / 찰랑, 허공을 깨뜨린다 / 기록되지 않을 나비의 문장에 오래 귀 기울인다 / 꼭 한 뼘씩 손을 벗어나는 나비처럼 / 꼭 한 뼘이 모자라 닿지 못하는 곳에 네가 있다 // 어느 날 저 나비가 / 허공 무덤으로 스밀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 봄날, 기다리는 안부는 언제나 멀다 ( ‘놓치다, 봄날’, 전문 62~63)

 이 봄에 읽지 않았다면 어쩔 뻔 했는가. 아릿하고 절절하고 시들이 많다. 봄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는 시집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편지 대신 이 시집을 건네도 좋을 것이다. 돌아오는 봄마다 의식처럼 읽어야 할 시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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