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기행]사세충렬문과 여인 4대의 몰살
[열녀기행]사세충렬문과 여인 4대의 몰살
  • 김지연 시민기자
  • 승인 2013.05.0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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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여성 4명을 죽음으로 내몬 ‘비극의 역사’

수많은 사람들, 특히 여인들을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간 병자호란. 지난 기행에서는 병자호란의 과정과 환향녀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조선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게 한 전쟁인 병자호란 당시와 그 이후를 통틀어 역사에서 많은 비난을 받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바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김경징(金慶徵,1589)~1637)이다.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전, 대륙을 통일한 청의 위협에도 조정에는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 척화론자(斥和論者)가 우세했기에 조선은 청의 요구를 무시하고 그들에게 대항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하여 1636년 12월, 청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인조 초•중반 정국을 주도하며 이조판서와 영의정 등을 역임한 김류의 아들 김경징을 강화 검찰사로 임명하게 된다.

 

사세충렬문

당시 강화도에는 김경징의 가솔들을 비롯하여 사대부가문과 고관,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등이 피난해 있었다. 그러나 천혜의 요새라고 불리던 강화도마저 청군에 의해 허무하게 짓밟히며 강화도에 거주하고 있었거나 피난을 간 수많은 여인들은 자결하고 병사들은 청군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 때 강화수비의 사명을 맡은 김경징과 그의 가족들도 비극의 현장을 벗어날 수 없었다. 집안의 4대에 걸친 여인 4명이 한꺼번에 죽는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이번 기행의 출발점은 네 여인의 죽음을 기리는 안산시 단원구 와동 151번지에 위치한 사세충렬문에서 시작된다.

사세충렬문은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김여물(1548∼1592)장군과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패하고 죽음으로써 열녀정신을 지킨 이 집안 여인들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지은 정문이다. 김여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립과 함께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과 싸웠으나 당하지 못하여 강에 투신, 순국한 인물이다. 열녀는 김여물의 후실인 평산 신씨, 아들 김류의 처인 진주 유씨, 손자 김경징의 처 고령 박씨, 증손자 김진표의 처 진주 정씨로 적군으로부터 순결을 지키기 위해 강화도 물에 몸을 던졌다. (출처: 문화재청)

안산시 고잔역에서 택시를 타고 10분 거리의 와동중학교 입구에 내리면 바로 앞에 '김여물 장군묘 및 신도비'와 '사세충렬문'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봄이 무르익어가는 건물 주위에는 파릇파릇한 풀과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지난 기행에서 찾아갔던 충렬사와 같이 정문에는 태극무늬가 새로 그려져 있고, 마찬가지로 문이 닫혀 있어 담장 너머로 안쪽 정문(旌門)이 언뜻 보일 뿐이다.

1637년 1월, 병자호란이 막바지에 다다라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적에게 수모를 당하느니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키고자 4대에 걸친 고부(姑婦)가 함께 목숨을 끊었다. 강화도 앞바다의 거센 해류로 인해 금성탕지(金城湯池•: 매우 견고한 성)라 불리어 너도나도 피난을 왔지만 결국에는 그 바다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무모한 전쟁으로 인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수많은 여인들 중, 공교롭게도 4대가 한꺼번에 자결을 한 비극은 역사를 찾아봐도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김여물 장군묘

사세충렬문을 지나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몇 분 안 되어 비석과 무덤들이 무리 지어 있는 곳이 있다. 그 중 김여물 장군묘 및 신도비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김여물 장군은 임진왜란 때 적군을 막지 못하여 탄금대에서 신립과 함께 강물에 투신 한 조선 중기의 충신이다. 김여물 장군의 후손은 김류-김경징-김진표의 순서로 대가 이어지고, 따라서 김여물은 병자호란 시기 강화 검찰사 김경징의 조부(祖父)이다.

그런데 김여물 장군 무덤과 그의 후실 평산신씨(신립 장군의 여동생) 등 이 집안 가족들의 무덤이 한 장소에 모여 있는 반면, 김여물의 손자이자 병자호란 이후 강화도 함락의 책임을 물어 사사(賜死)된 김경징과 그의 아버지 김류의 무덤과 묘비는 김씨 가문 묘지 근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찾은 끝에 김여물 장군묘에서 위쪽으로 5분정도 올라 등산로에서 동떨어져 있는 산등성이에 언뜻 비석들이 보이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경징과 김류의 묘지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에 쓸쓸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위쪽에 있는 김류의 무덤에 비해 김경징의 무덤은 관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데다 동물들이 파헤친 흔적이 군데군데 보였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누군가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할아버지인 김여물 장군 무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패장이라는 이름만이 남은 그의 삶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세간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김경징은 병자호란 당시 조정에 의해 강화 검찰사에 임명된 후 강화도로 피난한 대군이나 대신들의 의견은 무시하고 독단적인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또한 강화를 금성탕지로만 믿고 청나라 군사가 건너오지는 못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청군에 대해 어떠한 전략도 강구하지 않은 채 매일 술독에 빠졌다. 청군이 눈앞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방어 계책을 세웠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였기에 결국 1637년 1월22일 강화도는 함락된다. 이후 조정으로부터 강화 수비의 실책에 대한 탄핵을 받았는데, 당시 인조가 원훈(元勳) 김류의 외아들이라고 해 특별히 용서하려 했으나 탄핵이 완강해 사사(賜死)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과연 세간에 내려오는 얘기는 꾸밈 없는 사실이며, 병자호란 당시 강화수비를 맡은 김경징을 임금이 독약을 내려 죽일 만큼 책임이 과중했느냐는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장렬히 싸우다 자결하여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된 김여물의 후손이자, 인조 초 •중반의 정국을 주도한 김류의 아들인 김경징이 청군의 침입으로 인해 나라의 안위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청나라 군사가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않고 나 몰라라 술만 마셨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김경징과 김류 묘

실제로 조선왕조 실록 중 1637년(인조 15년) 2월 21일의 기록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김경징의 죄는 여러 장수들이 군율(軍律)에 저촉된 것과 비교하여 조금도 차등이 없습니다. ……사대부와 백성과 부녀자들이 베임을 당해 죽고 넘어져 죽고 줄지어 포로로 잡혀가게 하였으며, 10년 동안 국가가 저축한 것을 하루 아침에 다 없어지게 하여 장차 나라를 어떻게 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죄 입니까. ……만약 극형으로 복주(伏誅)시키는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종묘 사직의 영혼을 위로하며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시원하게 결단을 내리시어 속히 율대로 죄를 정하도록 명하소서.”

대신들이 전쟁의 책임을 물어 극형을 주장하자 인조가 답하기를,

“김경징이 거느린 군사는 매우 적었고, 장신은 조수(潮水)가 물러감으로 인하여 배를 통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율대로 처치하는 것은 혹 과할 듯싶다.”

인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김경징은 역적에 가까운 패장의 멍에를 쓰고 죽임을 당했다. 조부는 왜적과 싸우다 강물에 투신했고, 김씨 가문의 4대에 걸친 여인들 역시 차가운 바닷물에서 생을 마감했다. 병자호란은 전쟁의 패배 이전에 외교적인 패배이며, 그 중심에는 몰락한 명나라만 좇는 한심한 조선의 사대부가 있다. 임금이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치욕의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만 했다.

사세충렬문에 모셔진 네 명의 열녀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평가 받는 김경징의 쓸쓸한 묘가 역사의 비극을 말해주고 있다.

<김지연 시민기자>(상명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여자고등학교 2학년. 교내 영자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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