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 시인, 시로 안부를 묻다
박준 시인, 시로 안부를 묻다
  • cactus 시민기자
  • 승인 2013.04.11 16: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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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을 계속 만나고 싶다

[북데일리] <추천> 새로운 시집을 선보일 때마다 내용보다 어떤 표지 색이 나올지 궁금한 시집이 있다. 바로 문학동네시인선이 그것이다. 갈색 표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2012. 문학동네)은 32번째 박 준의 시집으로 출간과 동시에 화제를 불러 온 시집이다. 애틋한 제목 속 당신의 이름이 궁금하다. 때문에 표제작 시를 먼저 읽는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 / 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 / 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 / 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 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 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 / 었다’ 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 / 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전문, 55쪽)

 당신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지만 글에 대한 간절한 시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날카로운 꽃샘추위가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는 요즘, 이런 시는 더 좋다.

 저도 끝이고 겨울도 끝이다 싶어 / 무작정 남해로 간 적이 있었는데요 // 거기는 벌써 봄이 와서 / 농어도 숭어도 꽃게도 제철이었습니다 // 혼자 회를 먹을 수는 없고 / 저는 밥집을 찾다 / 근처 여고 앞 분식집에 들어갔습니다 // 몸의 왼편은 겨울 같고 / 몸의 오른편은 봄 같던 아픈 여자와 / 늙은 남자가 빈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집 // 메뉴를 한참 보다가 / 김치찌개를 시킵니다 // 여자는 냄비에 물을 올리는 남자를 하나하나 지켜보고 / 저도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봅니다 // 남자는 돼지비계며 김치며 양파를 썰어넣다 말고 / 여자와 말다툼을 합니다 / 조미료를 그만 넣으라는 여자의 말과 / 더 넣어야지 맛이 난다는 남자의 말이 끓어넘칩니다 // 몇 번을 더 버티다 / 성화에 못 이긴 남자는 / 조미료 통을 닫았고요 // 금세 뚝배기를 비웁니다 / 아이들이 보고 싶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 잔뜩 낙서해놓은 분식집 벽면에 // 봄날에는 / ‘사람의 눈빛이 제철’ 이라고 / 조그맣게 적어놓았습니다 (‘낙서’ 전문, 76~77쪽)

 차마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안부이자 연서는 아닐까. 때로 생은 철저하게 혼자인 시간을 부여한다. 부르지 않은 고독이 친구처럼 곁을 맴돌고 온기를 나눌 이를 찾을 수없는 순간들. 사귐에 익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겨를이 없는 생인 것이다. 사는 일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기도 한다.

 눈을 감고 앓다 보면 / 오래전 살다 온 추운 집이 // 이불 속에 함께 들어와 / 떨고 있는 듯했습니다 // 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 / 다음에도 길을 잃는 버릇이 있습니다 // 눈을 감고 앞으로 만날 / 악연들을 두려워하는 대신 // 미시령이나 구룡령, 큰새이령 같은 / 높은 고개들의 이름을 소리내보거나 // 역(驛)을 가진 도시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두면 / 얼마 못 가 그 수첩을 잃어버릴 거라는 / 이상한 예감들을 만들어냈습니다 // 혼자 밥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 / 전화를 넣어 하나하나 반찬을 물으면 / 함께 밥을 먹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 손을 빗처럼 말아 머리를 빗고 / 좁은 길을 나서면 // 어지러운 저녁들이 / 제가 모르는 기척들을 // 오래된 동네의 창마다 / 새겨넣고 있었습니다 (‘눈을 감고’ 전문, 82~83쪽)

 박 준의 시는 특별하지 않아 특별하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상실이며 추억이고 일상이다. 나와 같은 계절을 사는, 쏟아지는 비를 함께 보거나 싸구려 여관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 그런 생을 사는 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라 더 끌린다. 예쁘거나 좋은 것만 보이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슬픔과 커져가는 절망을 건네는 것이다. 첫 시집에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시집도 곁에 두고 싶다.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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