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행물윤리위 소식지 `책&`...우리말 왜 안쓰나
간행물윤리위 소식지 `책&`...우리말 왜 안쓰나
  • 북데일리
  • 승인 2007.02.21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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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저마다 자기한테 반가운 책을 찾아나 설 때, 책에 붙인 이름을 보고 살까 말까 흔히 망설입니다. 책이름 잘 붙인 책은 줄거리가 조금 모자라도 적잖이 팔리기도 하고, 책이름 잘못 붙인 책은 줄거리가 참으로 훌륭해도 눈길을 못 받기도 합니다.

벌써 스무 해 가까이 된 일입니다만, 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책이 하나 있어요. 이 이름은 거의 눈길을 끌지 못해서 죽을 쑤었습니다. 그러나 책이름을 두 글자로 새로 바꾸고 겉그림을 다시 꾸며서 펴낸 다음에는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줄거리와 엮음새는 똑같은데 책이름 하나 때문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또한, 이렇게 달라져도 좋을까요. 몇 가지 책이름을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 1 : ‘대지’와 ‘넓은땅’ -

부모님 집에서 설을 맞이합니다. 차례를 지낸 뒤 식구들이 둘러앉아 떡국을 먹습니다. 마루에 켜 놓은 텔레비전에서는 ‘무슨 시험대회 1등’을 했다는 사람들이 나와서 문제 맞히기를 겨룹니다. 펄 벅이라는 분이 쓴 소설이름을 맞추는 문제가 나옵니다. 문제를 들은 분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지>?”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문제 낸 이는 “네, 맞았습니다!” 하고 외칩니다. 문득, <대지>가 아니라 ‘넓은 땅’이라고 말했으면 어찌 되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우리들은 익히 ‘大地’란 한자말 이름으로 알고 있으나, 펄 벅 님 작품을 우리말로 처음 옮길 때 “너른 땅”이나 “넓은 땅”, 또는 “어머니 땅”으로 옮겼을 수 있으니까요. 앞으로 언제가 되든 이렇게 살갑게 책이름을 고쳐 옮길 수도 있고요. 철학가 플라톤이 남긴 말을 모은 책은 1950년대에 <잔치>라는 이름으로 옮겨집니다. 그 뒤 <향연>이라는 이름으로 옮긴 이가 있습니다. 요즘은 ‘잔치’로 책이름을 쓰는 곳이 있는 한편 ‘향연’으로 책이름을 쓰는 곳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찌 다를까요. 우리는 왜 두 가지 책이름으로 같은 책을 가리키고 있을까요.

- 2 : 책& -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저는 이곳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에서 ‘간행물윤리’를 따진다면 무엇을 살필까 궁금하지만, 여태까지 해 온 일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돈으로 떡바르는 출판사들이 사재기를 해도, 다른 데에서 애써 펴낸 책을 몰래 베껴내도, 대리번역이라든지 대필 작가로 이름발 날리며 거짓말을 쳐대는 이들이 판을 쳐도 ‘간행물윤리’에 얽혀든 적이 없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글쓴이나 옮긴이나 그린이 한테 인세를 떼어먹어도, 못된 출판계약서로 사람들을 옭아매어도 ‘간행물윤리’에 어긋난다는 판정을 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 없기 때문입니다.

? 책&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는 소식지를 다달이 냅니다. 2006년 12월에는 벌써 341호. 역사가 참 오래되었습니다. 소식지 이름은 ‘책&’. 예전에도 이 이름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다른 이름이었지 싶습니다. 하지만 잘 모르겠고, 굳이 알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내는 소식지 이름이 ‘책&’입니다.

‘책&’은 무엇을 뜻할까요? 무엇을 가리킬까요? 무엇을 나타낼까요? 글쎄,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어떻게 읽어야 하지요? ‘책앤’인가요?

┌ 책과

├ 책하고

├ 책이랑

├ 책과 함께

└ …

‘책&’을 ‘책앤’으로 읽는다면 미국말로 ‘책 and’라는 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요즘 세상은 미국말 우러르기 세상이라서, 나랏돈으로 꾸리는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도 이런 세상 흐름에 발맞추어 소식지 이름을 ‘책 and’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붙였는지 모릅니다. 그렇겠지요. 지금 세상을 미국말 우러르기 세상으로 가꾸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정부니까요.

그래서 이 소식지 이름, ‘책&’을 바꾸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적어도 뜻이 있는 사람이 엮는 소식지라면, 그리고 보통사람이 중심이 되고 책을 엮어내고 읽는 사람들이 참다운 ‘윤리’를 지키고 살피고 추스르도록 마음 쓰는 모임에서 엮는 소식지라면, <책과>라든지 <책이랑>이라든지 <책과 함께> 같은 말로 이름을 고쳐서 쓰면 어떻겠느냐 한 마디 하겠지만.

- 3 : 시가 내게로 왔다 -

지난해였나, 아버지가 새 차를 뽑아서 몇 번 얻어 탄 적 있습니다. 이때 뒷자리에 앉아서 찬찬히 둘러보는데 시모음 한 권 꽂혀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무슨 책인가 들여다보았지요.

- 시가 내게로 왔다 / 김용택

나온 지 여러 해 된 책입니다. 저는 이날 처음 보았지만, 느낌표 방송에서도 추천하는 책으로 뽑혔는가 보군요. 책겉에 느낌표 도장이 보입니다. 사람들한테 널리 알려진 김용택 님이고, 느낌표 방송에 한 번 뽑히면 책도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만큼, 이 시모음이 아버지 차에 꽂혀 있는 일도 남다르지 않습니다.

┌ 시가 내게(나에게) 왔다

└ 시가 나한테 왔다

“멧돼지가 나한테 달려왔어.”, “공을 나한테 던져.” 하고 말하는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글을 쓸 때면 말투가 글투로 달라지나 봐요. 말로는 어느 누구도 안 쓸 글이 버젓이 책이름으로 되고, 널리 퍼지고 읽히고 자리 잡는 모습을 보면요.

┌ 나한테 다가온 시

└ 내 마음에 다가온 시

겉멋이 아닌 속멋을 부릴 수 있다면, 아니 굳이 멋을 부릴 것 없이 수수하며 꾸밈없이 살아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참맛을 찾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더없이 반갑고 고마울 텐데요. 제가 너무 많이 바라나요? 바랄 수 없는 일을 바라나요?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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