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발품팔며 `교과서 수집` 미친 남자
20년 발품팔며 `교과서 수집` 미친 남자
  • 북데일리
  • 승인 2007.02.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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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수집하지 않으면 불쏘시개로 들어가고 말아요. 한국의 교육역사를 위해서라도 시골에 묻혀 있는 교과서를 끄집어내야 합니다”

[독서광의방⑨]대구 사는 양호열 씨

[북데일리] 화장실 휴지, 아궁이 불쏘시개, 이삿짐 쓰레기로 버려지는 교과서를 구하기 위해 전국을 발로 뛰는 남자가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한국교육역사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양호열(51)씨. “교과서만 보면 정신을 잃는다”는 교과서 수집광이다. 대구시 황금동에 위치한 작업실과 중동에 있는 창고에 소장중인 분량은 자그만치 1만여 권.

양씨가 공개한 창고에는 조선시대 산법서 수진본, 개화기의 유년필독 초등대한역사, 일제강점기 조선어독본, 미군정청시기 한글첫걸음, 한국전쟁기의 군용셈본 등 귀한 자료가 즐비했다. 문구류, 교복, 상장 등 교육 자료 또한 수백 점에 달했다. 낡은 교과서, 난로 위의 도시락, 나무 책상과 의자, 빙수기... 정교한 소품들이 하나의 교실을 재현하고 있다.

수집기간은 무려 20년. 모두 말 못할 고생 끝에 모은 피와 땀의 결정체이다. 민간인통제구역, 수몰댐 지역, 시골 폐가 등 교과서가 있는 곳이라면 땅 끝까지라도 달려가 수집했단다. 돈 한 푼 되지 않는 교과서수집에 이처럼 매달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양씨는 “선교 100년, 농업 100년 다 있는 데 교육 100년을 엮는 사람은 왜 아무도 없느냐”며 “교과서야 말로 교육사의 가장 중요한 산물인데 아무도 정리하지 않으니 귀한 자료들이 화장실, 불쏘시개, 파지로 버려지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지금 수집하지 않으면 교육의 역사가 모두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그의 경고는 단호했다. 후세에 물려주어야 할 교육자료 이기에 한 권이라도 더 수집해 교육사의 기초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수집 지론이다.

수집 초기, 양씨는 잘나가던 대기업 샐러리맨이었다. ‘최우수사원’ 표창까지 받으며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집 골목어귀를 지나던 고물상 리어카 한대를 만나고 인생이 바뀌었다. 그 안에는 파지로 버려지는 교과서들이 놓여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사용 된 ‘조선어독본’이었다.

국정교과서를 취급하는 서점을 운영하던 부친의 영향으로 교과서에 관심이 많았던 지라 버려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교과서를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밤새 책을 뒤적거리고 뜬 눈으로 새벽을 맞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렇게 버려져서는 안 된다. 교육사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교과서 수집은 누군가 해야 한다. 아무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겠다”는 각오가 용솟음쳤다. 그렇게 시작된 수집이 벌써 20년째다.

수집하면서 겪은 일화를 들려달라는 요청에 양씨는 “영화로 찍어도 부족하다”며 들뜬 기색을 보였다. 듣고 보니 수긍할 만 했다. 갖고만 있다면 수천만 원을 호가 할 귀한 자료를 시골 화장실에서 발견 한 것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물론, 벌써 팔아먹고 없다. 단 얼마라도 생기면 사모아야 하는 ‘가난한 숙명’ 탓에 남은 건 교과서뿐이지만 후회는 없다고.

웃지 못 할 일도 많다. 딸이 귀한 집안이라 양씨의 딸이 태어나자 집안은 축제분위기가 됐다. 모두들 귀한 아이가 났으니 삼칠일(21)안에 돌아다니면 부정을 탄다며 조심하라고 일렀다. 양씨 역시 아내의 산후조리를 도맡으며 집안일에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문제는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됐다.

경북 00 지역에 교과서가 한 박스 있다는 연락이었다. 누워 있는 아내를 보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틀을 고민한 끝에 집을 빠져나왔다. 모두가 잠든 시간. 새벽 4시였다. 간단히 요기라도 때울 심산으로 휴게소 앞에 잠시 멈췄다.

마침 난로 위의 두유가 눈에 띄었다. 따뜻한 병의 온기가 추위를 녹여 주는 듯 했다. 서둘러 뚜껑을 여는 순간, 사고가 일었다. 두유 병이 폭발하며 뜨거운 액체가 양 씨의 왼쪽 눈을 뒤덮었다. 응급조치는 했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갔다. 교과서가 있는 곳이라면 어떻게든 가야 했다. 양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교과서라면 그냥 미치는 거죠”라며 머쓱하게 웃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댐 수몰지역에 교과서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양씨. 손살 같이 도착해 보니 족히 50분은 걸릴 험난한 산길이었다. 비온 후라 무척 미끄러웠다. 험난한 산행의 고통이 교과서를 보자마자 봄눈 녹듯 사라졌다. 누가 가져 갈 새라 서둘러 책을 챙겨 내려왔다. 내려 올 때는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순간, 어깨가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옷을 벗고 보니 검은 피멍이 어깨를 뒤덮고 있었다. 살까지 헤져 피까지 흘렀다. 교과서를 구했다는 희열에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 양 씨는 이미 미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지금도 상비약은 늘 갖춰 놓는다. 가져 온 것은 다 봐야 직성이 풀리는 탓에 며칠이고 밤을 새고 쓰러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 양씨는 “좋아서 하는 거라 멈춰지질 않는다”고 밝혔다. 세상이 말하는 부와 명예와 동 떨어져 살아 온 삶. 아내에게 미안한 것을 빼면 후회는 없다니 행복한 삶이다.

“아직도 나는 미쳐있고 언제 깨어질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꿈꾸고 있어요. 교과서 이야기라면 밤새워 할 수 있는데 한번 들어보실래요?”

양씨의 자료는 24시간 개방된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든 반긴다니, 흥미로운 이들은 책 구경 한 번 나서볼 일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북데일리 http://www.whitepaper.co.kr/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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