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 3000억 기부한 영화배우 사업가
25년간 3000억 기부한 영화배우 사업가
  • 최영욱 칼럼니스트
  • 승인 2009.12.3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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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엠리치]세계 영화사상 최고의 마지막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1969)에서 로버트 레드포드와 함께 피날레를 장식한 명배우 폴 뉴먼.

2008년 9월 향년 83세를 일기로 영면한 그는 영화배우이자 카레이서이면서 지구촌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는 자선사업가이기도 했다.

1954년 첫 출연작 '은술잔(원제 ; The Silver Chalice)'으로 은막에 데뷔한 폴 뉴먼은 '상처 뿐인 영광',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영광의 탈출', '내일을 향해 쏴라', '스팅', '타워링' 등 작품성은 물론 흥행에서도 성공한 명작들에 출연하면서 대스타로서의 면모를 과시해 왔다.

이후 1986년 60대에 들어선 그는 톰 크루즈의 멘토로 등장한 영화 '컬러 오브 머니', '허드서커 대리인' '로드 투 퍼디션' 등 다양한 장르에서 모습을 보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암투병 중 별세하기까지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두 80여편의 영화에 출연했던 그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평생 공로상을 비롯 칸느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으며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와 인기 TV시리즈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진보와 자유를 추구하던 그는 68년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전에서 반전을 공약으로 내세운 유진 맥카시를 지지하면서 공화당 진영에게 '찍힌' 뒤, 71년 닉슨 정부시절 백악관에서 은밀히 작성한 '정적 블랙리스트' 20인 중 한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2006년까지 14년 동안은 미 수정헌법 제1호에 명시된 '표현의 자유' 수호한 미국 거주자에게 주는 상의 스폰서로 활동했다.

그가 속도감을 즐기는 '질주본능'을 본격적으로 끄집어 낸 계기는 69년 영화 '영광이여 영원히(원제 ; Winning)'에서 카레이서 역을 맡으면서부터. 전문 레이싱 교육까지 받는 그는 79년 24시간 살인적인 경주스케줄을 소화해 내는 프랑스 '르망 레이스'에 참여해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2명의 동료와 함께 세운 기록은 프랑스 북서부 코스 4088㎞를 평균 시속 170.33㎞로 달렸던 것. 또 '스포츠카 클럽 오브 아메리카 내셔널 챔피언십' 4차례나 우승과 함께 세계 기네스북에 '공식대회에서 우승한 최고령 레이서'로 등재되어 있다.

폴 뉴먼은 생전에 "나는 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했다. 즉 내 인생에는 기회와 선행의 운이 있었는가 하면, 한 평생 팔자를 고쳐볼 행운이 허용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는 잔인한 운이 있다는 것"이라며 항상 사회공헌에 대한 신념을 지녀왔다.

1980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폴 뉴먼은 절친인 극작가 A. E. 허츠너와 함께 지인과 이웃들에게 줄 선물을 고민하던 중 샐러드 드레싱을 떠올리게 된다.

자신이 직접 개조한 차고의 지하실에 작업장을 차린 두 사람은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처럼 방부제, 감미료, 인공 색소를 첨가하지 않는 대신 올리브유, 레드와인 식초를 사용하고 제품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방부제 대신 겨자씨를 이용해 천연 식재료로는 넣었다.

특히 신경을 썼던 부분은 드레싱을 담는 용기. 앤티크글라스로 만든 우아한 빈 와인병에 고급 라벨을 붙였던 것. 폴 뉴먼으로부터 성탄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드레싱의 맛에 반했고 인기가 높아지자 남은 드레싱을 식료품점에 판매해서 부수입을 챙겨야 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원가가 높은 원재료 확보도 중요했지만 이를 사업화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방식으로 샘플을 만들어줄 제조업자와 용기 제작사를 찾는 일이 시급했다. 그리고 초기 자본금 1만 2,000달러를 가지고 '100% 천연재료 무방부제 드레싱'이라는 제품 컨셉으로 82년 허츠너와 함께 자신의 성을 딴 회사 '뉴먼스오운(Newman’s Own)'을 설립, 사업을 시작한다.

스타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예의 인간적인 친화력을 바탕으로 사업 파트너들과 의견 차이와 대립을 조율해 가면서 회사는 성장하기 시작해 제품 출시 6주만에 초기 투자금을 모두 회수한다. 사업 첫 해 92만 달러의 매출에 이어 5년 만에 연평균 매출 20%의 성장률과 이후 순수익 16%를 기록했다. 당시 식품업계 연평균 순익성장률이 3.4%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공인 셈.

드레싱소스에 이어 '100% 천연재료 스파게티 소스'도 개발해 인기를 끌었고 파스타 소스, 레모네이드, 스테이크 소스까지 제품 영역을 확대한다. '유기농 식품'에 대한 인식과 인지도가 없던 시대에 친환경적인 요리 보조식품 및 첨가물을 내세워 '자선과 공익을 위한 부끄럽지 않은 광고'를 통해 브랜드를 마케팅을 펼쳐 나간 것이 주효했다. 뉴먼스오운의 성장과 더불어 미국 사회에서도 유기농과 친환경 제품에 대한 관심이 높이지게 됐다.

93년 뉴먼스오운의 사업부문으로 만들어졌다가 2001년에 독립한 자회사 '폴 뉴먼 유기농 식품'은 소스 외에도 3년 동안 인공비료나 살충제를 전혀 쓰지 않은 농장에서 기른 유기농산물 제품을 생산한다.

빵, 쿠키, 팝콘, 프레첼(매듭 혹은 막대 모양의 비스킷으로 주로 맥주 안주로 애용), 초콜릿 크림, 땅콩 버터, 올리브오일, 천연 식초, 말린 과일과 레모네이드, 포도주스, 커피를 비롯한 음료 을 생산하고 양배추 등 채소를 재배해 각종 식품을 만들어 팔면서 성장세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폴 뉴먼의 딸 넬은 93년부터 '뉴먼스 오운'에서 사업경험을 쌓은 뒤 현재 자회사 CEO를 맡으면서 친환경 유기농 유아용 식품도 선보였다. 인증기관을 통해 식품 안정성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 절차를 거치며, 소비자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제품 라벨에 폴 뉴먼과 딸의 얼굴그림을 넣어 출시해서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 12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특히 창립 후 25년 동안 뉴먼스오운은 샐러드 드레싱에서 천연식품까지 175가지 음식과 음료 제품을 생산해 벌어들인 수익의 100%를 전세계 자선단체에 기부해 왔다. 그 금액은 무려 미화 2억8000만달러(약 3300억원)에 달한다.

회사 설립 첫해부터 '해마다 모든 수익금을 기부하고 재투자를 받는다'는 원칙을 세운 뒤 고수하면서 '뉴먼스 오운 재단'을 통해 이를 실천에 옮겨 왔다.

88년 6월 난치병 어린이를 돕기 위해 코네티컷주에서 시작된 '산골짜기 갱단 캠프'는 '홀 인 더 월 캠프(www.HoleInTheWallCamps.org)'로 이어져 미국 내 30개주를 넘어 프랑스 헝가리 우간다 베트남 등 전 세계 30여개국 11개 캠프로 확산됐다. 이곳에서 13만 5천여명의 어린이들이 치료와 요양을 겸해 낚시, 승마, 수영으로 천혜의 자연환경을 즐기며 건강을 되찾아가고 있다.

또 청소년 약물 오남용 예방 기관 '스코트 뉴먼 센터'와 기업 사회공헌 활동을 지원하는 '기업 자선 촉진 위원회(CECP)'도 설립했다.

회사의 모토 '공공선을 추구하는 부끄럼없는 개척정신'은 폴 뉴먼이 창업 당시부터 내세운 뉴먼스오운의 미래상이자 임직원들의 철학이다.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사치롭게 살고 있기에 우리처럼 부유층에 대한 감세는 범죄와 다름없다. 나는 운이 무척 좋았기 때문에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은 그들보다 불운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_ 폴 뉴먼 (Paul Leonard Newman, 1925년 1월 26일 ~ 2008년 9월 26일)

(이미지 = 2007년 남성스타일 매거진 GQ 창간 50돌 기념호에서 지난 50년 동안 가장 스타일리쉬한 남성 50인으로 선정됐던 폴 뉴먼과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포스터)

[최영욱 패션밀 모즈인터내셔날 대표] www.fashionm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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