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신경림
17. 신경림
  • 북데일리
  • 승인 2007.01.1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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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2004)

[북데일리] 소설가 조정래는 자신의 집필인생 20년을 “글감옥에 갇혀 살았다”고 표현했다. 그의 말을 빌자면, 시인 신경림은 ‘책감옥’에 갇혀 살고 있다.

신경림의 서재엔 책 1만여 권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책장이 사방 벽면을 모두 둘러쌌고,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책은 바닥을 점령했다. 곧 이사를 할 예정인 시인은 “이 책들을 어찌 옮기나 걱정돼 죽겠다”고 엄살을 부렸다. 말과 달리, 얼굴엔 뿌듯한 미소가 그득하다.

서가 하나는 전부 시집이다. 나머지는 문학, 인문, 역사 등으로 분야가 다양하다. 이 중 유난히 창비에서 출간한 도서가 눈에 띤다. 출판사 초창기 때 평생회원에 가입해, 지금까지 무료로 받아보고 있단다. 회사가 어려우니까 돕는다는 마음으로 가입비 백만 원을 냈다. 지금으로 따지면 ‘책 로또’에 당첨된 셈.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창비는 계약을 파기하고 싶을지도 몰라요.(웃음)”

소장서가 워낙 많다보니 때론 빨리 읽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기다리고 있는 서적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져, 정독보단 ‘남독’을 한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에 가속이 붙어 하루에 두세 권은 거뜬히 해치운다. 단, 종종 내용을 기억 못한다는 맹점이 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한꺼번에 여러 권을 펼쳐든다. 이 책 저 책과 수런수런 대화를 나누는 재미를 포기할 수 없어서다.

“책을 읽으면 심심하지가 않고, 성취감도 충만해지지. 독서만한 웰빙이 없어요.”

일흔을 넘긴 고령의 나이에도 시인이 정정함을 유지하는 비결이 여기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김남천의 <맥>, 가와카미 하지메의 <가난이야기>, 백석. 이용악. 정지용의 시들이, 그의 건강을 책임진 대표적인 ‘웰빙’ 작품들이다.

근래엔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2004)를 완독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명을 받았다.

“나는 공산주의자는 절대 아니지만 1930년대 한국에 대안이란 게 없었어요. 그 시대에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은 순수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지. 이 책은 그들의 운동이 얼마나 깨끗하며 인간적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어요.”

신경림은 “읽다가 눈물이 나서 혼났다”며 “꼭 읽어보라”고 재차, 삼차 강조했다. 이로도 모자랐는지, 서가에서 꺼내와 실물을 확인시키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이쯤 되면 책과 담쌓은 이라도 궁금해질 만하다. 짧게 설명하자면, <경성 트로이카>는 잊혀진 혁명가 이재유의 생애와 활동을 생생하게 복원한 소설이다.

이렇듯 작가이기 전에 독자의 한사람으로, 시인은 ‘점점 책과 멀어지는 세태’가 못내 안타깝다. 50년간 벌인 시작(詩作) 활동의 밑바탕이 독서였기에, 더욱 그렇다. 그는 “학교교육이 아이들에게 책 읽는 재능만 부여해도 성공한 것”이라며 “독서에 재미를 붙이면 공부는 저절로 된다”고 역설했다.

얼마 전 출간한 <처음처럼>(다산책방. 2006)은 이 같은 생각의 발로. 독자가 시에 재미를 붙이게 하기 위해, 평소 애송하던 시 50편을 엮었다. 신경림에 의하면, 시란 무릇 눈보다는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야 제 맛이란다.

이야기는 그가 남을 위해 쓴 유일한 시 ‘가난한 사랑 노래’로 옮겨갔다.

작품의 주인공은 시인이 자주 드나들던 동네 술집의 딸과 그의 애인. 남자가 도피중인 노동운동가라 결혼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서, 신경림이 직접 식을 준비해 주례를 섰다. 그 때 선물한 축시가 바로 ‘가난한 사랑 노래’다. 지금 부부는 인천에서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나도 젊을 때 그런 사랑을 한 경험이 있어요. 실패한 첫사랑이 다른 사람의 성공에 오버랩된 거지. 남을 위해 썼지만, 결국 담은 정서는 내 거였어.”

일화를 알고 나서 읊는 시는 더욱 애잔하다.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이 가슴까지 전해온다. 이것이 신경림이 말한 ‘제 맛’인가 보다. 깊은 울림을 독자와 나누기 위해, ‘가난한 사랑 노래’ 전문을 싣는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 두 점을 치는 소리 /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북데일리 고아라 기자 rsum@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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