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와돈]가수 방미, 200억대 부자될 자격있는 이유①
[스타와돈]가수 방미, 200억대 부자될 자격있는 이유①
  • 아이엠리치
  • 승인 2007.07.12 17: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온 가슴 불 밝히고 기도해 봐도 / 당신은 떠나가고 홀로 남는다 / 어둠은 서리서리 깊고 깊은데 / 무심한 텅 빈 거리 바람만 분다 / 아하 불어라 높새 바람 하늬바람 / 내 가슴 텅빈 가슴 날려라 하늘까지 / 아하 불어라 돌개바람 회오리바람 / 사랑도 추억도 날려도 산넘고 바다건너..." (86년 KBS 가사대상 금상 가요 '사랑도 추억도' 중에서)


올해로부터 28년전인 79년, 당시 여고생이었던 18세 코미디언 지망생 박미애는 MBC 코미디언 공채 2기 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잠깐 코미디 프로에 얼굴을 내비치나 싶더니 이듬해 80년 평소 꿈꿔왔던 가수의 길에 첫발을 내딛었다.


보니엠, 이럽션 등 많은 팝 가수들이 리메이크해 불렀던 닐 세다카의 명품 팝송 '원 웨이 티켓'을 우리말로 번안한 '날 보러 와요'를 불러 데뷔 하자마자 큰 인기를 얻었고, 80년대 초반 '주저하지 말아요' '계절이 두번 바뀌면'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로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됐다.


여고생 코미디언 박미애는 가수 방미(45)로서 80년대를 주름잡는다. 당시 MBC와 KBS의 각종 가요대상을 휩쓸면서 84년엔 '바람새'로 서울국제가요제 빌보드상을 수상했고 85년 일본 동경세계가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은상인 챠밍레이상을 거머쥔다. 프랑스와 일본 등의 가요 및 오락프로에도 얼굴을 내비치며 라디오 DJ와 MC로도 잘 나가던 그는 93년 앨범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마지막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공연을 위해 뉴욕에 왔다가 뉴요커의 매력에 흠뻑 빠졌던 방미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유학생활을 이어나간다. 한국어학연수를 마친 뒤 뉴욕 브룩컬리지에서 연극과 연출을 공부한 그는 이윤택의 연극 '가인'에 출연하는 등 만능연예인으로서의 끼와 재능을 과시했다.


2002년엔 17번째 앨범 '뉴 레볼루션'(New Revolution)으로 다시 팬들앞에 돌아오면서 방송활동을 재개했다. 신곡 대신 80~90년대 노래를 리메이크해 팬들에게 친숙함을 주면서도 당시 유행하던 하우스댄스나 리듬앤블루스 등 젊은 팬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리듬을 빌렸던 이 앨범은 '중견가수의 컴백'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그리고 2007년 여름, MBC와 KBS 등 각종 아침 대담프로와 경제정보 오락 프로그램에서 방미는 '부동산 재테크 전문가'로서 잇달아 초대받고 있다. '자산 200억대의 자수성가형 부자가 되어 팬들 앞에 돌아온 가수 방미'가 그 주인공이 된 것이다.


운도 많이 따라 줬지만 그의 운의 8할은 스스로 만들어냈다고 표현해야 옳다. 가수로서 인기를 얻었지만 배움에 대한 갈증과 낯선 땅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은 그를 가수를 넘어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유학생활 당시 한국이 외환위기로 원화 환율이 급격이 평가절하됐던 98년 초, 1달러가 800원이었던 것이 2,200원까지 치솟아 짭짤한 재미를 봤다. 이 기회를 통해 뉴요생활과 사업도전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부동산 투자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유학자금이던 현금 14만달러와 집안살림살이, 고가의 벤츠 승용차를 팔아 한국으로 달러를 송금해 한달만에 2배가 넘는 환차익을 낼 수 있었고 이를 종잣돈으로 뉴욕에서 콘도를 분양받는데 투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어려서 넉넉치 못한 가정에서 살면서 누구나 부에 대한 동경을 꿈꿔올 수는 있지만 단칸방에서 출발해 30번이 넘게 이사를 다니며 부동산 재테크로 '200억대의 부자'가 됐다. 2000년에 뉴욕의 업타운에 위치한 집을 30만달러에 사서 부동산 시세가 오를대로 올랐던 2004년 늦가을에 짭짤한 수익을 남기며 매각했다. 또 1년 전에는 전망이 좋았던 맨해튼72번가 리버사이드의 30만달러짜리 콘도를 샀다가 1년도 채 안되어 60만달러에 팔아치우는 수완을 보이기도 했다.


그 역시 성공한 사람들이 겪었던 고난의 길을 수순처럼 밟았다. 지인에게 사기를 당해 절망감에 빠져 대인기피증에 두려움과 우울증으로 6년여의 시간을 보낸일도 있다. 아직도 그 상처는 씻기지 않고 있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만든 기억이었다.


하지만 방미는 "돈을 잃어버린 분노보다는 속임수에 넘어가 내 인생에 오점으로 남아버린 실수를 참을 수 없었다."며 독기를 품었다.

 

사실 최고인기를 누리던 20대 가수시절에 방미는 절제된 생활과 규칙적인 생활 방식으로 철저히 자기관리를 해왔다. 지금의 성공을 낳게 한 그의 생활 자세는 이렇듯 너무나 간단하고 당연하면서도 또 어려운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스스로 '너무 정확하고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 탓에 사람들과 멀어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실수와 실패보다는 성공과 자부심이 결국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관리하는 길이라 믿고 있다.


"혼자 잘 지내고 외로움과 고독함을 즐기며 살아 온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술, 담배는 해 본적도 없고 클럽이나 나이트에 놀러가 춤을 추거나 노래방이나 가서 노래하고 쓸데없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신세 한탄하고 남 욕하는건 더욱 싫다. 내가 그렇다는 것이다.(오해 말기를)" - 방미의 글 중에서 발췌


(2부에 계속 ; 사진 = 출처 www.bangme.co.kr) [아이엠리치 강지훈 기자]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