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책을 더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아내
③ `책을 더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아내
  • 북데일리
  • 승인 2006.10.3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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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광의 방] 안양사는 오흥근씨

`독서광` 오홍근씨의 독서력을 설명 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은 신문 스크랩이다. 10.26 사태 이튿날인 1979년 10월 27일부터 스크랩을 해 온 그는 “누군가는 역사를 기록해야 할 것 같아서”라는 ‘가슴 뭉클한’ 수집의 이유를 밝혔다. 스크랩의 주를 이루는 것은 북섹션 기사, 인문학, 문학, 출판에 관한 것. 소장 분량의 1/10밖에 내놓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믿기 힘들 정도의 방대한 양이 쏟아졌다. 북디자이너 뺨치는 솜씨로 만들어 놓은 표지는 눈길을 사로잡았다. 친구 사무실에서 얻은 다이어리로 만든 것이다.

오 씨의 서재에는 풀, 본드, 테이프, 다이어리 표지 등 스크랩북 만드는 도구가 놓여 있다. 부부가 커피숍에서 가져 온 플라스틱 막대는 풀을 바르는 데 사용된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자료를 보면 오릴 수 있도록 칼을 갖고 다니는 것 역시 오 씨의 오래된 습관. 수십 년 간 갈고 닦은 ‘연습’ 덕에 지금은 수십 장의 신문도 비틀림 없이 잘라내는 실력을 발휘한다. 좋아하는 것에 미치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오 씨는 신문 스크랩에 열중하다가 졸도한 적도 있다.

“퇴근 후면 서재에 들어가서 나오지를 않아요. 어느 날은 새벽까지 기척이 없길 래 들어 가보니 쓰러져 있는 거예요. 스크랩 하던 건 주변에 널려있고... 얼마나 놀랬는지....”

아내 이미형 씨는 큰 일 없이 해결되기는 했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 ‘철렁’해지는 사건이라고 했다. 오 씨는 그런 일을 겪고도 신문스크랩을 멈추지 않았다. 모든 신문을 다 볼 수 없기 때문에 식당에 가면 신문부터 챙기고, 쓰레기통까지 뒤져 신문을 모은다. 역사적 값어치가 있다고 믿기에 해 온 스크랩이다. 3백 권만 모이면 갤러리를 빌려 전시회를 하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다. 남편의 이런 편집광적 기질을 바라보는 아내의 시선은 어떨까. 아내 이 씨는 남편을 이해한다는 의외의(?) 답을 건네 왔다.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걸 공감해주면 좋잖아요. 못하게 하면 서글플 것 같아요. 섭섭하게라도 하는 날에는 시비도 걸어보지만, 좋아하는 것이니 존중하려고 노력해요”

이 씨는 다른 것도 아닌 책을 좋아하는 남편이기에 자랑스럽다며 생활에 좀 더 여유가 생기면 원하는 책을 마음껏 사주고 싶다고 했다. 물론, 이런 아내의 이해심이 ‘공’으로 쌓인 것은 아니다.

오 씨는 아내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신경숙의 ‘푸른눈물’ 100회 분량이 묶인 예쁜 스크랩북을 수줍게 꺼냈다. 신문에 연재 중인 소설이고, 언젠가는 책으로 나올 것이지만 아내가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어 스크랩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남편을 어찌 미워 할 수 있을까. 일요일이면 배낭을 메고 헌책방을 떠돌기 일쑤고, 책방 순례라도 하는 날에는 “먼저 들어가 있으라”는 말만 던지고 책방으로 사라져 버리는 남편이지만 그 순수한 진심을 알기에 아내는 남편을 믿고, 사랑한다.

부부는 생일 선물로 책을 주고받는다. 아내에게 받은 책 앞에 그 마음이 너무나 고마워 “마누라야 고맙다!”라는 글씨를 큼지막하게 써 놓은 남편. 다치바나 다카시의 고양이 도서관을 부러워하는 남편을 위해 언젠가 그런 서재를 지어주고 싶다는 아내. 좋아하는 것을 서로 인정해 주는 이들은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책 이야기, 신문 이야기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오 씨. 그는 책은 한 사람의 인생, 사상이 녹아 있는 것인데 만 원 밖에 하지 않으니 얼마나 싸냐며 다른 데는 돈을 아껴도 책 사는 데는 돈을 아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릴 적, 놀러올 때마다 책 선물을 해주던 사촌 형 덕에 취미를 붙이게 된 책읽기. 그와 함께 걸어온 40여년의 세월 끝에 갖게 된 꿈은 무엇일까. 오 씨는 두 가지 희망을 밝혔다.

“꿈이요?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와서 아무 때나 쉬다 갈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어요. 그리고... 마지막 꿈이 하나 있는데... 이병주 문학의 근거지를 서울에 만드는 거예요. 이병주 선생님의 호가 ‘나림’이잖아요. ‘나림서원’이라는 현판을 건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겠어요”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의무감으로 한 것도 아니었기에 책을 모으는 동안, 신문 스크랩을 하는 동안 너무나 행복했다는 오 씨. 그의 주름진 이마 위에 비친 책 그림자가 보는 이를 눈물겹게 했다.

(오 씨의 블로그 = http://blog.naver.com/ohgn)

(사진 = 고아라 기자)

[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bookworm@pimedia.co.kr

화이트페이퍼, WHITE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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