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연금술사` 미셸 투르니에 일기
`언어의 연금술사` 미셸 투르니에 일기
  • 북데일리
  • 승인 2006.10.17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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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자신의 사생활을 적은, 그날그날 적은 글을 묶어 낼 때 `내면의 일기(Journal intime)라고 하죠. 그런데 나의 경우는 그렇게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외면적으로 관찰하거나 생각한 것이라는 의미로 `외면일기(Journal Extime)이라고 제목을 붙였어요. `extime`라는 말은 내가 만든 조어예요. (역자 김화영 교수와의 인터뷰 중에서, P317)

<외면 일기>(현대문학. 2004)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표제의 숨은 뜻을 스스로 밝힌 대목이다. 외면 일기는 그의 말대로 외부를 관찰하고, 그 외피에 감추어 있던 대상들의 본질을 파헤치려 한 그의 일상의 노트이다. 이 외면의 일기는 열두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있고, 각 챕터는 각각의 달의 불어 명칭이 붙어있다.

최근들어 부쩍 나는 미셸 투르니에의 책들을 읽는다. <외면 일기>에서 시작된 나와 그의 여행은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에 붙인 그의 짧은 사색이 담긴 <뒷모습>, 두 가지 대조적이나 대칭적인 화두에 던져진 그의 단상들이 담긴 <생각의 거울>로 지속되고 있다. 앞으로 겨울이 오게 되면 나는 시커먼 슈바르츠발트(Shwarz Wald)의 음습한 골짝을 <짧은 글, 긴 침묵>과 나란히 <예찬>과 함께 하게 될 듯 싶다.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가 미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 속에 등장한 환하게 이마가 벗겨진 그는 결코 미려한 외모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칠순을 훌쩍 넘기는 그는 환한 미소로 자신의 부족한 결핍을 메우고 있으니, 나는 그 대조가 만들어내는 미소를 더욱 상큼하게 느끼게 된다.

둘째, 내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혼자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수사도 아니건만, 그는 파리 근교 생 레미 슈브류즈의 사제관에서 혼자 살아간다. 물론 그에게 아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낳지는 않았지만, 그는 한 아이를 데려다 키웠고, 그 아이가 이제는 마흔의 중반에 접어들어 그의 아들이 가끔 미셸 투르니에의 집을 찾는다 한다. 그는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셋째, 그는 신화 탐구자이다. 그의 소설은 쉽지 않다고 한다. <마왕>과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은 끝없이 이어지는 신화적 알레고리와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이성의 시대에 신화적 사유를 실천한 그에게는 마녀인 나를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넷째, 그는 철학적이다. 들뢰즈와 함께 대학을 다녔다고 하니 그도 한 때는 철학도였다. 그런 영향 때문이지 모르지만, 그의 산문 속에 비치는 철학적 사유는 문학적 수사에 깊이감을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여러 분야에서 박식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쪽에 편중되지 않으면서도 골고루 경험하고 두루 좋아한다는 점.... 이래저래 나는 그의 글의 연금술에 폭 빠져있다.

<1월 >

오스트리아 텔레비젼 방송을 보다 비엔나 왈츠를 연주하는 교향악단 지휘자에게 반한 투르니에씨.... 지휘자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다. `그가 하는 일은 자신의 온몸으로 음악을 육화시키는 것이다.` 여행을 즐기는 그가 여행 할 때면 빼놓지 않는다는 쌍안경. 그것은 훔쳐보기 기질과 소설가로서의 직업적 호기심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2월>

사진을 좋아하는 그가, 사진과 문학의 상관관계를 렌즈의 조리개에 비유해 설명한다. 조리개를 적게 열수록 장면의 깊이가 깊어진다. 다시 말해서 풍경의 깊이가 또렷해진다. 반대로 조리개를 크게 열면 겨냥하는 피사체는 또렷해지는 반면, 그 나머지는 모두 흐릿하다. 아마도 영국식 영어를 배웠을 그가, 미국의 패권주의에 밀린 영국의 인구를 대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 인도, 영어권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를 합치면 영국의 백배도 넘는 인구가 되고, 그들의 고유 언어는 영어식 잡종어로 캠브리지와 옥스퍼드 영어를 절망시키기 십상이다. 영어는 뿌리 뽑힌 언어이다.

<3월>

빅토르 위고는 "음악은 생각하는 잡음이다."라고 말했다. 번뜩이는 천재와 완전한 어리석음이 한데 섞인 이 말은 과연 빅토르 위고다운 표현이다. 이 말은 빅토르 위고에 대한 모욕인지 칭찬인지 헷갈린다.

<4월>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8가지(정확하지 않다) 시선`, `transfiguration` 등을 작곡한 꽤 종교적 색체의 프랑스 작곡가 메시앙(이름도 좀 그렇지 않은가?) 을 안다면 이 대목은 꽤 재미있게 읽힌다. `1992년 4월 프랑스의 작곡가 오리비에 메시앙과 영국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이 동시에, 거의 같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소식. 이보다 완벽하고 더 자연스러운 대조는 상상하기 어렵다. 하늘을 노래한 작곡가와 지옥을 그린 화가가 동시에 죽어 서로 만나고 서로 이해하게 되다니`

그의 친구인지 후배인지 알 수없지만, 이런 날카로운 사유를 할 수 있는 재치 있는 지인을 옆에 둔 그가 많이 부러웠다. 그 친구의 말인 즉 `피라미드의 형태 자체는 아주 아득한 고대에 이미 노동자들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일을 적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거울이란 아이디로 인터넷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던 내가 거울 부분에서 멈추어 나를 들여다보지 않을 리 없다. `유리 거울은 19세기에 처음 생긴 것으로 베니스에서 고안되었다. 그리고 그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거울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거울을 처음 본 한 농부와 그의 아내의 이야기, 동화적 구조를 갖고 있는 문학적 꼬임(twist)에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5월>

낭독의 중요성에 대해 또 다시 일깨워준 구절이다.

`글을 쓸 때도 나는 내가 쓰는 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어봄으로써 테스트해봅니다.(자신이 쓴 글을 큰 소리로 읽곤 했던 플로베르를 생각해보십시오).`

<6월>

`육체적인 면에서 서로 잘 맞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주 사소한 기벽이 애정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지만, 그 반대인 경우에는 폭발적인 노여움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는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육체의 불능과 작가에 대한 그의 생각....

`어떤 사람들-특히 작가들(어네스트 헤밍웨이, 로맹 가리)-은 성적으로 불능이 되었다고 느낀 나머지 자살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7월>

투르니에 이웃에 사는 정육점 주인의 변은 사람을 잘 안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려보게 해준다.

`투르니에씨, 나처럼 진짜 당신을 잘 아는 처지라면 당신이 쓴 책 같은 것은 안 읽어도 되는 거죠, 안 그래요?`

하긴 누가 쓴 책 속에 글쓴이의 진실만 담긴다고 보기 어렵다. 허구가 많은 경우, 오히려 독서가 습관이 안 된 사람은 대혼란에 빠져 자신이 피부를 느끼는 글쓴이에 대해 처음부터 인식의 재구성을 시도해야할지도 모른다.

<8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4번 제 1악장이 가슴을 찌르는 듯 집요하게 머릿속에 떠오른다.`

미셀 투르니에는 이 음악을 들으며 다음번 소설의 음향적 등가물을 찾아낸 듯 기뻐한다 그러면서 그 음악을 말로 옮겨놓기만 하면 될 것 같은 흥분에 휩싸인다.

<9월>

어원을 존중해서 생각해본다면 히스테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려 볼 수 있다. 즉 히스테리란 섹스가 머리로 올라온 현상인 것이다. 히스테리 환자는 자신의 두뇌가 아니라 섹스를 통해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가끔 그런 경우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성인이 있을까? 다만 자신을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거나, 의식이 지나치게 과도해서 대답을 회피하는 것은 아닐까? 신경질이 잔뜩 났을 때 자신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차는지 관찰해보자!

<10월>

작가들의 죽음에 대한 웃을 수 없는 고찰, 그런데 웃음이 나온다.

`자동차 사고(로네 니미에, 알베르 카뮈, 롤랑 바르트)보다 덜 어이없는 것이며, 자살(헤밍웨이, 몽테를랑, 로맹 가리, 들뢰즈)보다 문제가 적고 질병(말로, 사르트르, 유르스나르)보다 덜 추악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가 이 작가들의 죽음과 비교한 것은 누군가로 부터 살해당한 케이스다. 웃으면 안 되지만, 작가들의 죽게 된 경위를 카테고리한 것이 재미있었을 뿐.

<11월>

그의 글에 의하면 괴테는 밤중에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재빨리 적어두기 위해 잠잘 때 머리맡 탁자 위에다가 늘 쓸 것을 준비해두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깨어나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짧은 동안 섬광처럼 어떤 대단히 중요한 생각을 적어두었다는 기억이 나서 노트를 펼쳐 보았는데, 굵게 획 그은 선 하나란다. 결국 괴테도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는데, 이 대목에서 프로이트가 떠올랐다.

<12월>

병에 대한 이분적 접근.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을 그는 분류한다. 양적인 것으로는 과도 혹은 부족의 증상들로서 고혈압이나 저혈압, 빈혈. 질적인 것으로는 독이나 세균, 박테리아의 감염, 혹은 마귀들림.

`avoir le coeur gros(마음 아프다) 란 프랑스어 숙어는 직역하면 `심장이 터질 듯이 커졌다`란다. 이 표현을 통해 볼 때 슬픔은 결핍이 아닌 추억, 감정, 눈물이 넘쳐날 정도로 가득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정말 멋지다. 한 가지 배웠다.

이렇게 미셸 투르니에를 읽으면서, 나도 메모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물론 나도 메모를 하지 않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여기저기에 해두기 때문에 취합할 수 없는 한계점이 있다.

외면일기를 손에 들고 누군가를 만났던 작년 여름. 그 때 내 옷은 외면일기의 표지처럼 완두콩 색 바탕에 페이즐리 무늬가 새겨진 블라우스였다. 그 때 내 손에 들려있던 `외면일기`는 그에게 전해졌고, 지금 읽고 있는 `외면 일기`는 새로 산책이다. 얼마 전 그가 내가 작년에 건넨 `외면 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미셸 투르니에식 사고가 우리의 삶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을 듯하니, 그의 다른 책들도 읽기를 권했다. 누군가 함께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눌 수 있는 것도 즐겁지만, 누군가와 함께 글을 쓰는 것은 더 재미있다..

아, 외면일기는 차이코프스키의 `사계`와 함께 읽으면 참 좋을 듯하다. 차이코프스키의 사계도 12개의 월별로 구성된 음악이니까... .

[북데일리 김영욱 시민기자] sylpl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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