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반도체계약학과 신설하는 정부와 삼성, 급할수록 멀리 봐야
[기자수첩] 반도체계약학과 신설하는 정부와 삼성, 급할수록 멀리 봐야
  • 이재정 기자
  • 승인 2019.03.28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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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T 산업 전반과 대학 내 계열별 편차까지 두루 살펴 인재 육성해야
반도체 1위 기업 삼성전자가 정부와 손잡고 주요 대학에 반도체계약학과 신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반도체 인력 부족과 일자리 문제를 동시에 잡겠다는 취지에서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기업인과의 만남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나빠진 반도체 경기'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같은 날 이재용 부회장은 문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1등 대기업으로서 '일자리 3년간 4만명'을 꼭 지키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사진=연합뉴스)
반도체 1위 기업 삼성전자가 정부와 손잡고 주요 대학에 반도체계약학과 신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반도체 인력 부족과 일자리 문제를 동시에 잡겠다는 취지에서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기업인과의 만남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나빠진 반도체 경기'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같은 날 이재용 부회장은 문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1등 대기업으로서 '일자리 3년간 4만명'을 꼭 지키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사진=연합뉴스)

[화이트페이퍼=이재정 기자] '서울대학교 반도체학과 20학번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반도체 1위 기업 삼성전자가 정부와 손잡고 주요 대학에 반도체계약학과 신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반도체 인력 부족과 일자리 문제를 동시에 잡겠다는 취지에서다.

'좁다'는 느낌이 든다. '명견만리',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상투적이지만 지당한 말들이 떠오른다. '4차 산업혁명을 마주한 이 시점에 발등의 불이 비단 반도체뿐인가?'라는 의문마저 든다. ICT분야 가운데 인력난에 시달리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며 취업난에 허덕이는 계열도 이공계 뿐만은 아니어서다.

문 대통령ㆍ이재용 부회장 '반도체 안좋다' 손뼉이 만들어낸 '반도체계약학과'   

28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정부와 삼성전자가 비메모리 반도체 인력을 키우기 위해 서울대 등에 반도체학과를 설립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우수 인재를 미리 확보, 육성해 반도체 설계 생산 현장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전문 인력을 채우겠다는 계획이다. 학부 과정부터 계약채용제가 도입되는 건 삼성재단 소속 성균관대학교를 제외하곤 처음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러한 구상 아래 서울대, 연세대, 울산과학기술원(UNIST) 등과 반도체 계약학과 설립을 협의중이며 KAIST·한양대도 후보로 거론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의 구상에 따르면 반도체계약학과에 선발되는 학생들에겐 학비가 지원되며 졸업 후 채용이 100% 보장된다. 단, 기업이 제시한 커리큘럼을 이수해야 한다. 삼성전자가 성균관대학교에서 채용조건형 계약학과로 운영 중인 성대 반도체시스템 공학과의 경우 졸업생의 90%가량이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DS)에 취업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인력 수급을 위해 국내 톱 대학들의 강의실 안까지 파고든 배경에는 메모리 반도체 업황 악화가 있다. 중국발 물량 공세에 글로벌 시장의 수요까지 들쑥날쑥하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향후 비메모리 반도체에 역점을 두겠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반도체 전문 인력 수급 자체가 딸리는데다 중국으로 대거 유출까지 되고 있어 반도체 산업의 위기론까지 불거졌다. SK하이닉스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러한 반도체 업황이 반도체계약학과 개설까지 이어진 데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입김이 컸다. 문 대통령은 기업인과의 만남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나빠진 반도체 경기'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이날 이재용 부회장은 문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1등 대기업으로서 '일자리 3년간 4만명'을 꼭 지키겠다"고 강조했다. 최근엔 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비메모리 반도체 인재 육성책’을 언급했다. 

반도체, 쏠림에 따른 상대적 공백은 어쩌나 

반도체계약학과 설립에 따른 상대적 쏠림 현상은 반대급부의 공백으로 이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5개 대학에만 이 학과가 신설돼도 한해에만 국내 톱 대학의 우수 학생 중 최소 500명이 반도체 기업으로 흡수된다. 몇년 후엔 누적인원이 수천 명에 이른다. 이는 미국의 간판 공과대학인 MIT와 사뭇 다른 그림이다. 매사추세츠 대학(MIT)은 올 9월, 약 1조 1천억원을 투자해 AI 단과대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 단과대는 AI기술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학문 영역이나 타 단과대와 경계를 두지 않고 융합이라는 토대 위에서 광범위하게 AI를 교육한다. AI칼리지 설립이 발표된 지난해 10월, 라파엘 리프 총장은 생물학·기계공학·전자공학 등 공학은 물론 사회·경영·역사 등 인문사회 학생들도 AI라는 언어를 전공과 함께 의무적으로 배워 연구에 자유자재로 활용하게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 인재가 부족한 분야는 반도체 뿐만이 아닌 코딩, 클라우드, 빅데이터 등 소프트웨어 부문을 포함한 ICT산업 전반이다. 물론 반도체가 이러한 ICT산업과 긴밀히 연결되지만 반도체에만 기대서는 총체적 준비를 할 수 없다. 미국과 중국 등이 우리 나라 소프트웨어 우수 인력을 학부 시기부터 차출해가고 있는데 대한 위기감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이러한 실정에서 반도체 학과에 우수 인재를 몰아넣겠다는 건 우리나라 수출 품목이 반도체에 쏠려있는 불안정성을 우려하면서도 여전히 반도체에 목매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일명 '돈 안되는' 기초학문과 인문사회과학, '돈 되는' 이공계열간 편차 문제 또한 여전하다. 반도체계약학과가 개설되면 대입부터 특정학과 쏠림현상과 경쟁 과열 심화도 동반될 조짐이다. 취업난에 있어서도 이미 졸업한 학부 졸업생들이나, 외국 학위 취득 인력에 밀리고 있는 국내 대학 석박사 인재들에게는 의미가 없고 구조적 문제에 대한 처방도 되지 못한다. 

■급할수록 기본부터 

미국의 비메모리 글로벌 시장 점유율은 70%로 압도적이다. 한국은 3%로 4%인 중국에도 뒤져있는 상태다. 삼성전자와 정부의 절박한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는 지점이다. 중국만 해도 중국 칭화대 캠퍼스 내에서 각종 IT 기업을 창업하고, 이를 칭화 홀딩스가 모회사 형태로 경영하는 등 기업 투자와 협업이 활발하다 못해 파격적이다. 미국선 첨단 기술을 취급하는 기업이 주정부에 사업 계획서를 제출하면 주립대가 나서서 관련 학과를 개설하거나 연구원을 증원하는 일이 다반사라는 말도 돈다. 이쯤에서 한국 대학 교육이 육성하려는 인재상이 궁금해진다. 철저한 계획경제 아래 국익 중심으로 교육 시스템을 콘트롤하고 지원하는 중국과, 자유 경쟁이 교육과 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미국의 중간 어디쯤에 있는 듯 모호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네이버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강연에서 특별 대담자로 나선 오세정 서울대 총장이 우리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우리가 기르고자 하는 인재상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한 대로다.
 
지난달 18일 김정식(90) 대덕전자 회장은 'AI(인공지능) 센터' 신축에 써달라며 예금 등 사재(私財) 500억원을 서울대 공과대학에 기부했다. 노환으로 입원 중인 김 회장은 한 언론 매체를 통해 "4차산업 시대에 하드웨어 개념은 사라졌고, 모든 공학 분야에 소프트웨어를 접목해야 한다"며 "4차산업을 따라가야 하는데 대학이 그대로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대학과 교육 환경의 근본 문제점을 지적한바 있다.

김 회장을 자극한 건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AI 단과대'를 설립한다는 보도 내용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 회장의 아들은 "아버지는 '우리 산업이 추격형이 아니라 선도형으로 바뀌어야 하는 변곡점에 있다'고 강조해오셨다"면서 "'이에 필요한 인재 교육이 절실한 만큼 학교에 숙제를 내 준 것'이라고 기부 동기를 밝히셨다"고 전했다.

이제 산업통상부와 삼성전자 등은 대학 내에서의 기업 투자를 다소 불편하게 보는 시선을 넘어서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의 경우만 해도 학부 차원에서 채용 전제 계약학과를 세우려면 학부장 회의에서 동의를 받아야 하며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될 경우 이사회를 거쳐야 한다. 정부나 국내 첨단 산업 대표 기업의 안목이 김 회장 같은 개인에 뒤지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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