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말년에 경복궁 기피한 이유
세종 말년에 경복궁 기피한 이유
  • 박세리 기자
  • 승인 2013.02.01 17: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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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뒤안길로 사라진 궁에 대한 이야기

[북데일리] 궁궐과 궁은 약간 다른 개념이다. 궁궐은 왕이 정사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라면 궁은 왕족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조선의 숨겨진 왕가 이야기>(평단.2013)은 이들 왕가(王家)를 키워드로 삼아 궁에 숨겨진 역사를 소개한 책이다.

왕족들의 수만 헤아려보더라도 조선의 옛 수도였던 서울에는 많은 궁이 남아있어야 한다. 출가한 왕의 자녀들이 살던 곳도 궁이라 불렀으니 그 수는 방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 사대문 안에는 5대 궁궐 외에 크게 눈에 띄는 곳이 없다. 왜 그럴까. 책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선 시대 한양에는 많은 궁이 생겨났다. 왕족에게는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경비와 제사에 드는 비용을 마련할 수 있도록 세금을 걷을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백성의 조세 부담을 키웠다.(중략) 고종 갑오개혁으로 중요한 곳만 남기고 대부분 정리됐다. 또한 일제강점기 여러 가지 조취로 국토 소유권을 조사했다. 이때 대부분의 궁은 황실 소유로 판명되어 국유화 됐다.’ -본문 중

책은 궁을 중심으로 역사 전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일들을 전했다. 특히 시대의 영웅이자 대왕으로 칭송받았던 세종에 대한 일화나 눈에 띄었다. 책에 따르면 세종은 죽음을 앞둔 말년 경복궁을 기피했다고 한다. 자녀들의 요절 등의 이유로 경복궁의 풍수설의 압박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세종은 아들이나 사위, 형제 등의 집으로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고 한다. 그러다 영응대군(세종의 막내아들)의 집에 거처할 곳을 마련했고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근대에 이르러 수난을 겪어야 했던 궁도 소개했다. 바로 칠궁이다. 칠궁은 조선 왕실의 후궁 7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곳인데 1968년 김신조 사건으로 대변화를 겪었다. 이 사건은 당시 북한군 31명이 청와대 침투를 목적으로 휴전선을 넘어온 사건이다.

책에 따르면 이들 북한군은 경복고등학교 뒷문과 칠궁 사이까지 침투했다고 전했다. 이 일로 당시 종로경찰서장과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청와대 경호를 이유로 칠궁 서쪽 도로를 내면서 칠궁은 축소, 이전 됐다.

책은 궁을 중심으로 역사의 이모저모를 전했다. 지금은 흔적 없이 사라진 왕가의 잔재를 모아 퍼즐을 맞추듯 이야기를 엮었다. 궁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이 돋보이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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