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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흥재
 2008-05-14 09:00:51  |   조회: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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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세이]서유미의 <쿨하게 한걸음>을 읽고

서유미의 장편 <쿨하게 한걸음>을 읽으며 부아가 일고 괜한 짜증이 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나이와 상관없이 주인공 연수의 지리멸렬한 일상을, 무미건조란 낱말이 딱 어울리는 졸렬한 그 삶을 나 역시 습관처럼 살아내고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맞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날지도 추락하지도, 나아가지도 물러설 수도 없는 일상의 한 지점에 나는 멈추어 서 있고, 또한 ‘낑기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소설의 주인공 연수와 닮아 있다는 고백이다. 이미 불혹을 지나 곧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철들지 못했으며, 지천명은 고사하고 여전히 미혹하고, 삶이란 생애의 한 가운데에서 지금도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부끄러움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어느 광고의 카피는 언제나 열려 있는 여러 가능성을 부추기지만, 소설을 읽은 내게 나이는 무엇을 하고 싶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직도 모르는 연수의 서른셋보다 더 슬픈 숫자로 다가온다.

차라리 (자식 다 키우고 퇴직하여 노년의 덧없음을 슬퍼해야 하는) 연수의 아버지처럼 최성수의 동행을 들으며 울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동행이 될까~” 나는 울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연수처럼 홀가분한 미혼도 아니다. 연수처럼 대입시절을 추억하기는커녕 몇 달 있으면 대입시험을 치르는 다 큰 자식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나의 정신은 다시 꿈을 찾고 그 꿈을 꾸기 위해 제2의 사춘기를 치러야 하는 연수를 닮아 있다. 슬프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러하기에 행복하기도 하다.

연수처럼 백수도 아니요 결혼하란 성화에 가위 눌릴 미혼도 아니다. 제법 예쁘고 싹싹한 아내도 있고 크게 속 썩이지 않고 잘 자라주는 자식도 둘이나 있다. 결코 효도하는 착한 자식이 아님에도 못난 외아들 욕먹을까 감싸주며 오래 살아주시는 부모님도 계시다. 이 고약한 자본주의사회에서 부자가 될 공산은 전혀 없지만 그런대로 먹고 살기는 할 것도 같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연수처럼 불안을 친구삼아 서성이고 초조를 안주삼아 술을 들이켜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녀처럼 ‘캐러멜라떼’ 한 잔에 통장잔고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는 아닌데도 말이다.

“부글거리던 연애만 국자로 걷어내도 인생은 참 단출해진다.” 연수처럼 걷어내면 좋으련만 내 일상과 시간 속에서는 쉽게 걷어낼 것이 많지 않다. 국이 식어 엉겨 붙은 기름띠처럼 내 삶의 그릇에는 끈적끈적한 기름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자식으로서의 ‘나’와 아비로서의 ‘나’, 그리고 남편으로서의 ‘나’, 그 뿐인가. 직업인으로서의 ‘나’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나’ 등등 주변과 조직과 관계해야 하고, 기억의 한 편에서는 슬프고 아린 시간과도 끊을 수 없는 일상을 살아야 한다. 내게 있어 인생이란 여전히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거운 짐이다. 그렇다고 소설 속의 동남처럼 자살을 택해 그 짐을 내려놓을 용기는 더욱 없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지나간 사랑의 대상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먹고사는 문제만 없으면 다 때려치우고 그림읽기 같은 새로운 공부나 하며 살고 싶다. 배운 도둑질이라고 정신의 곳간을 채워주신 은사님들의 뒤를 잇는 글쟁이가 되고 싶기도 하다. 치솟는 물가와 부족한 생활비 걱정보다는 책이며 영화며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오래도록 통음할 수 있는 친구와 밤을 낯 삼고 싶다. 폼 잡고 체면 구기지 않으려고 타고 다니는 대형차보다도 미어터지는 대중교통이 편안하고 한가로이 걸을 수 있는 뚜벅이 인생으로 살면 좋겠다.

아파트 평수를 자랑하고 부동산을 보러 다니는 연재보다는 우울증에 걸려 시를 읽고 생각을 끄적이는 연재가 더 사랑스럽다. “저녁때 베란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는 걸 보면 가슴이 막 미어져. 내 인생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우리 모두 어디로 가고 있나. 그런 생각 때문에.”하는 연재를 이 나이 이 처지에도 비웃을 수 없다. 비록 한 때 스치는 생각일지라도 가끔씩은 그런 생각으로 우울해지고 싶다.

네버랜드를 벗어나 ‘웬디’로 변신한 선영이는 닮고 싶지 않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이 무정한 자본의 정글에서 나는 분명 선영을 닮아야 하고 웬디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선영에게 공존하는 ‘천재의 본성과 날라리의 습성’중에서 가능하면 날라리의 습성이 내게 오래도록 남아 있기를 나는 소망한다. 때로는 ‘청춘의 전당포’에 들러 하루 종일 죽 때리는 죽돌이의 시절도 사무치게 그립다.

이 잔인한 세상에서 누구 한 두 명은 철딱서니 그지없고 한없이 멍청해도 좋은 것이 아닌가. ‘무한도전’의 캐릭터들처럼 보편과 상식과 경쟁으로는 살 수 없는 원형세포질의 인간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어야 한다. 시댁과 남편의 몰이해에 맞서 이혼을 결심하고 때 늦은 유학을 감행하는 민경처럼 관성 파괴적 인생이 많아야 세상은 균형이 맞춰지고 전망이란 동인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래를 준비하며 현재를 사는 거야.” 말하는 연수의 말이 맞다 손치더라도, 누구는 더 미래를 준비하고 누구는 더 과거를 그리워하며 산들 세상이 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서른 살 정도면 인생의 모든 것이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 있을 거라 믿었”던 연수의 삶도 “서른셋씩이나 되고 보니……. 삼십대는 빛나지도 않고 젊음의 절정도 아니며 여전히 바람과 파도가 아슬아슬하게 키를 넘기는 태풍 속일 뿐이”지 않던가.

결혼을 미루고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명희의 인생이 가치 있는 것처럼, 그저 죽어가 는 연애세포를 걱정하며 남자결핍 바이러스를 호소하는 희주의 하소연도 값진 것이다. 어차피 세상이란 불임 때문에 고통스런 은주에게나 아이가 생길까봐 걱정해야 하는 민경에게나 다 똑 같은 세상이며, 아귀 맞지 않은 부조리함을 견디도록 강요하는 악마의 동굴 같은 곳이다.

다행히 “시작하기에 적당한 때란 없었던 것 같다”라는 연수의 고백은, 역설적으로 언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너무 자주 무릎을 꿇고 넘어질지라도, 그 자리에서 손을 집고 일어서지 않으면 저만치 걸어갈 수 없다는 분명한 삶의 자세를 우리는 잊지 않을 수 있다. 삶의 시간과 현실의 고통이 아무리 동남의 그것처럼 무거운 것일지라도, 괴물과도 같은 자본의 횡포가 우리의 삶을 온갖 불균형과 소외로 위협하는 세상일지라도 우리는 동남의 선택을 따를 수도 따라서도 안 되는 것이다.

삶이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말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거와 같다.” 연수는 이제 그 먼 길을 가기 위해 남은 시간의 배낭 속에 새로운 꿈과 에너지를 챙겨 넣는 중이며, 그녀를 닮은 것이 짜증이 났던 나는 어느새 그녀를 흉내 내고 있는 중이다. 인생이란 길 위에서 연수를 만났듯, 나는 겨우 연수가 다다른 지점에 서 있다. 연수보다 더 지치고 힘없는 모습으로. 그러나 연수와 그녀의 일상을 통해 삶의 비밀을 알게 된 지금, 초조할 것도 슬플 것도 없다.

“한 편으로는 산다는 게 보물찾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모퉁이를 돌다, 어느 나무 밑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살면서 그 숨겨진 비밀들을 얼마나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 문득 연수는 ‘영화’에서 삶의 이정표를 발견하고, 나는 그런 연수의 일상을 통해 <양철북>의 오스카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때론 뻔뻔하게 때로는 측은하게.

연수의 엄마는 유명한 교수가 되어 TV에 나온 동창을 보고나서부터는 히스테리 증상을 보인다. ‘나보다 잘난 것도 없었던 얘’가 대학교수라니……? 인생은 지옥의 먹구름으로 뒤덮인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이다. 적어도 그 후의 시간부터는 삶에 바친 대가의 크기가 다른 법이다. 끈기거나 열정이거나 못난 재주를 보완해줄 무엇을 잘난 그는 바친 것이라 인정함이 마땅하다. 이제라도 ‘쿨하게 한걸음’ 가야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고통에 대해 엄살을 부리지 않았기에” 동남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연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엄살의 시대에 바보같이. 동남이 울 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얼마나 엄살을 떨며 살았는가, 살고 있는가? ‘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울지언정, 어차피 스스로 감당해야할 ‘살이’의 무게를 핑계 삼아 엄살을 떠는 어른답지 않은 어른으로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잠시 멈춰서는 순간이 온다. 넘어지든, 숨이 차서 주저앉든, 한번쯤은 멈춰서 자신을 앞질러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뒤따라오는 사람의 얼굴과 주변 풍경도 둘러보게 되는 것이다. (……) 나의 상태는 인터넷 검색 화면 하단에 뜨는 문구와 다를 바 없다. ‘웹싸이트를 찾았습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중…….”

작중 화자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검색 화면을 클릭하고 내가 갈려는 삶의 싸이트를 찾는 중이다. 연수처럼 “절대로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막을 내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없어도 “도전하고자 하는 무엇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해 나가”는 삶의 블로그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간극을 좁히기 위해 살아가”기 위하여 부지런히 이웃과 소통하고 댓글을 달며, 때로는 온상의 허위에도 놀라며 살고 있을 것이다. 다만 걱정인 것은 <쿨하게 한걸음>, 그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발걸음이라는 정도……. 봄은 지지만 여름은 피어난다.

2008-05-14 09: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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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 2008-05-21 19:33:52
솔직한 자기 얘기!!

김민영 2008-05-19 23:52:30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글 자주 보고 싶습니다.